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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Sep 12. 2016

뉴욕: 남의 주방을 엿보는 일


한 달간 빌린 맨해튼 아파트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주방을 살펴보는 이 비밀스러운 의식을 시작하기 전, 나는 조금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수납장을 열어 냄비나 향신료 따위가 얼마나 효율적인 동선으로 정리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음식 부스러기나 조리용 소스 등으로 그 사람의 취향과 삶의 철학(?)을 내 마음대로 추리해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에게 냉장고는 속옷이 담긴 서랍장 맨 윗칸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인 것 같다.


ㅅㅇ의 냉장고를 열었다. 엄지손톱만 한 버터 조각과 세 장의 이탈리아산 관챌레 햄, 약간의 뻬꼬리노 치즈가 우스우리만치 작은 용기에 들어 있었다. Blue Apron, 파란색 앞치마 로고가 그려진 작은 용기에 담긴 식재료들. 그것은 한 끼 식사용 레시피와 그에 맞는 재료를 집으로 배달해주는, 요즘 뉴욕에서 꽤 인기가 좋다는 온라인 서비스의 '제품'이었다. 아마 일 이 년 전쯤이었을 거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이건 사업 아이템이라며 흥분하여 떠들었다. 일인 가구의 바쁜 사람들을 대신해 메뉴를 고르면 한 끼 요리에 필요한 소량의 재료를 배달해 준다는 이 앱 서비스가 베를린인지 유럽 어딘가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에게 삶의 중심을 이루는 즐거움을 빼앗아가는데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우선순위가 있다.

그날 저녁의 메뉴를 정하고, 시장에 가 이 집 저 집 채소 가게를 기웃거리는 일. 제철을 맞아 에틸렌 가스의 도움 없이 한껏 익은 채 가판대를 가득 채운 토마토들의 향기를 맡고, 붉은 뿌리 무의 잎사귀를 뒤적이며 벌레는 안 먹었는지, 어떤 묶음이 조금 더 풍성한지를 엄격하게 살피며 장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모두의 보편적 즐거움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나의 이렇게 큰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지치고 버거운 또 다른 '노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정쩡한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꽤 놀라우리 만치 긴 시간을 노동하며 하루를 보낸다. 아침 해가 뜰 무렵 눈을 떠, 해 질 녘까지 일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보통'의 삶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대도시 도시인의 삶은 사람들을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1,500불이라는 거금을 주고 임대한 맨하탄 upper east side의 이 작은 공간. 그럴싸한 침대를 놓을 공간도 부족해 사다리를 놓아 복층으로 만든 이 창고 같은 맨하탄의 고시원 방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는다. 그곳은 일상을 마치고 돌아와 잠을 자는 곳, 몸을 씻고 바깥세상의 삶을 시작하기 전의 공간,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곳 주방에 식기라고는 머그컵 두어개 큰 공기 한개, 그리고 뚜껑 없는 냄비 하나가 전부였다.


아마도 그 작은 관첼레 햄과 치즈 패키지는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만들기 위한 패키지 재료였을 거다. 내게 집을 빌려준 그녀는 그래도 식욕을 잃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여기서 난 무슨 요리를 하게 될까? 저 뚜껑 없는 작은 냄비를 가지고 오늘 저녁엔 뭘 해 먹지? 이런저런 생각이 산만하게 스쳐 지나간다. 뉴욕에서 세 달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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