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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Oct 27. 2022

고작 '짠 강'이라니... 이름 잃은 강화도 바다

'강화해협'이 '염하'로 불린 까닭

강화해협


살얼음이 잡히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에 눈 대신 가랑비가 내렸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성큼 겨울이 찾아올 것 같다. 다가올 겨울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래도 추운 것은 반갑지가 않다. 더구나 추운 날 ‘강화나들길’을 걷는 것은 썩 내키지 않다.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해안가 둑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시려오는 듯하다.


소설()이 지난 며칠 후 길벗들과 함께 나들길을 걸었다. 갑곶돈대에서 출발하여 초지진까지 가는 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이다. 강화대교 근처에 있는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가는 총 길이 17km인 '호국돈대길'은 강화도의 지리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 강화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바다는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 같은 곳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 시설들을 만들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대대급 규모인 진(鎭)과 보(堡)를 4개씩이나 이곳에 두었고 그 아래 소대급 규모인 돈대(墩臺)도 십여 곳이나 있다. 말하자면 호국돈대길은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얼을 떠올려 보며 걷는 길이다.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바닷가 둑길을 걷는다. 햇빛을 받은 갯벌이 번쩍인다. 망둥이를 잡는 걸까, 낚싯대를 던져놓고 고기가 물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간혹 보인다. 고요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에 우리 또한 한 점 그림이 되어 걷는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이 바다는 길이가 약 24km이며 폭은 약 500~600m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좁다. 그러나 예전에 뱃길로 서울을 오가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했다. 말하자면 강화와 김포 사이의 좁은 이 바다는 마치 서울이라는 넓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대문과도 같았다.


바다라고 했지만 강처럼 보여서 그런지 다들 만만해 한다. 심지어는 "애걔, 무슨 바다가 이렇게 좁아?" 하면서 헤엄쳐서도 건널 수 있겠다며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강 이름이 뭐냐'고 하면서 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지도에는 '강화해협'이라고 나와 있지만 대부분 '염하(鹽河)'라고 부르는 이 바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문득 강화 사람들은 이 바다를 어떻게 불렀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강화읍 출신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 어릴 때는 그냥 갑고지 앞 바다라고 불렀어요." 라고 했다. 갑고지는 갑곶을 뜻하는 말이다. 갑곶은 강화에서 서울로 오갈 때 이용하던 갑곶나루가 있던 곳이니 '갑고지 앞 바다'는 곧 갑곶 앞 바다인 셈이다.


강화해협의 중간 지점인 불은면이 고향인 사람에게 물어보니 '터진개 앞 바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터진개는 광성보 인근에 있는 지명인데 들판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 근처 사람들은 터진개 앞 바다라고 불렀는가 보다. 길상면 사람들은 '초지 앞 바다'라고 불렀단다. 바다 근처 동네가 초지리이기도 하고 또 초지진이 있으니 그곳 지명을 따서 불렀던 것 같다.


이처럼 강화 동쪽 바다인 이 강화해협은 근처의 동네 이름을 따서 '무슨 앞 바다'라고 불렀다. 강화도의 옛 지도를 살펴봐도 강화와 김포 사이의 바다에 따로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도 '염하'라는 별칭으로 불리니 무슨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염하'는 어디서 온 이름일까


해협(海峽)이란 육지와 육지 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를 뜻하는 말이니 김포와 강화 사이의 이 바다도 해협이 분명하다. 학술 저서와 교과서 등에는 '강화해협'이라고 적혀 있는 이 바다를 사람들은 흔히 ‘염하’라고 부른다. ‘염하’라는 이름에는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는데도 그런 연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화해협’을 ‘염하’라고 알고 또 그렇게 부른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해진 뒤 천주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임금보다 천주(하느님)를 더 높이 받드는 천주교인들을 조정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는 것은 천주교인들이 서양 오랑캐들과 내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내어 처벌했다.


1866년(병인년) 3월 한 달 동안에 조선에서 몰래 포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주교와 신부 열두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사형을 당했다. 안 그래도 호시탐탐 조선과 통상의 기회를 엿보던 프랑스는 이것을 빌미로 쳐들어온다. 병인년 봄에 일어난 병인박해는 양인들의 난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으니 그해 가을에 일어난 병인양요가 바로 그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중국으로 탈출한 3명의 선교사들로부터 이 사실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중국 해안에 있던 극동 함대의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조선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한다. 로즈 제독은 공격하기에 앞서 정확한 뱃길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해안과 한강의 뱃길을 정찰하고 또 조선군의 해안 방어시설과 수비체계를 알아낼 목적으로 1866년 9월 18일에 세 척의 군함을 출항시켰다.



'조선원정기속 강화 모습


앙리 쥐베르(Henri Zuber)라는 프랑스 해군 견습 소위도 이때 조선원정대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873년에 <르 투르뒤몽드>라는 잡지에 '쥐베르의 조선원정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는데 그 책에는 강화해협의 모습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강화도에 속하는 서안(西岸)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총안을 낸 성벽으로 보강되어 있고 성벽을 따라서 대부분 고지 위에 축조한 작은 요새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 통로를 뚫고 진입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중에 우리가 강화도에 들어가서 그 섬에 수많은 요새들과 화약고들과 무기고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 통로가 조선의 군사(軍史)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9월 18일에 출항한 프랑스 군함은 강화해협에서 조선군의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우수한 화력으로 조선군을 제압한 그들은 한강 뱃길을 조사하면서 행주 나루를 지나 지금의 양천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조선은 프랑스 함대를 막기 위해 수많은 배를 염창으로 보내 한강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신식 무기를 당할 재간이 없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대포를 쏘아 조선 수군을 물리치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화진을 거쳐 25일에는 서강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극동에서 세 번째 가는 나라의 수도 앞에 정박했다면서 쥐베르는 책에서 자랑을 한다. 그들은 한강을 따라 다시 내려오면서도 계속 수로를 측량했고 모든 자연물들을 관찰하여 수집했다. 말하자면 프랑스군은 수도인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해협과 한강의 해도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군이 작성한 해도(海圖)에는 강화와 김포 사이의 바다가 "Rivière Salèe"로 기록되어 있다. salèe는 '짠, 짭짤한, 염분이 있는'의 뜻을 가진 말이고 Rivière는 하천(河川)이니 강화해협을 소금기가 많은 강이라고 봤던 것이다.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작성한 해도에 표기된 'Rivière Salèe'라는 이 이름은 그 후 강화해협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1년 뒤인 1867년에 일본 해군성은 프랑스에서 이 해도를 입수한 뒤에 일본어로 번역하여 다시 펴냈는데 이때 "River Salèe"를 '염하'로 직역해서 '고려서안 염하지도(高麗西岸 鹽河地圖)'라고 제목을 붙였다.



'염하'를 '강화해협'으로


그로부터 4년 뒤인 1871년 신미년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과 개항을 목적으로 쳐들어왔던 미 해군도 프랑스 해도의 원본을 편집한 해도를 가지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이처럼 '염하'라는 이름에는 제국주의의 야욕이 담겨 있다. 바다를 강으로 낮추어 불렀음은 물론이거니와 침략과 약탈의 의미가 담겨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염하'라고 부른다. 만약 이름이 붙은 연유를 알면 공분에 차서 그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염하강'이라고도 한다. 이는 마치 '역전앞'처럼 '소금강의 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강화해협이라는 말에는 강화도의 위치와 지리적 특성까지 담겨 있다. 그러나 '염하'라는 말에는 그런 특성들을 찾아볼 수 없어 부연 설명을 해줘야만 듣는 이가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강화도의 특성도 찾기 어렵다.


강화군 길상면 초지 앞바다에서 강화읍 갑곶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약 24km에 달하는 바다의 이름은 강화해협이다. 강화의 위치와 지리적 특성까지 다 담긴 간단명료한 이 명칭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한자로 '甲串津 前洋(갑곶진 전양)', '草芝鎭 前洋(초지진 전양)' 같이 표기를 했다. 지금으로 보면 '갑곶나루 앞 바다', '초지진 앞 바다'와 같은 말이다. 옛 것을 익혀 오늘에 이어가는 것이 바로 '온고지신'이리라. 그러니 강화해협의 특정 지역을 부를 때는 그곳 지명을 따서 하면 된다. 예를 들면 '강화해협 OO 앞 바다' 식으로 표기하면 명쾌할 것이다.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바다를 강화해협이라고 바르게 불러보자. 거센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우리 선조들의 얼과 넋이 깃들어 있는 해협이니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후손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다.


'염하'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은 이제 그만 버리고 '강화해협'이라고 부르자. 그러고 보니 강화해협을 따라서 걷는 호국돈대길은 본래 우리 이름인 '강화해협'을 찾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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