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54개 돈대(墩臺), 그 흔적을 찾아서
변경(邊境),강화는 변경이었다. 국경이었고 변방이었다. 변경인 강화를 지키기 위해 ‘돈대’가 있었다. 강화 섬 해안을 따라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며 54개의 돈대가 강화를 수호했다.
돈대(墩臺)는 변방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로 강화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국방 유적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관방(關防) 유적이기도 한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요충지에 주로 쌓았다.
돈대를 찾아간다. 세월의 흐름 속에 돈대는 허물어지고 더러는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는 돈대들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게 많다. 인적 없는 돈대에서 시간 여행을 한다. 돈대는 조선시대로 우리를 데려가 준다.
돈대가 찾아왔다
돌아보니 2022년은 돈대에 꽂힌 한 해였다. 음력설을 쇠자말자 돈대기행에 나섰다. 매달 두 차례 ‘돈대를 찾아가는 길’을 진행했다.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하는 2월에 시작한 돈대기행이 어느새 일 년을 앞두고 있다. 그 사이 스무 번 가까이 돈대기행을 했으니 올 한 해는 돈대와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돈대가 내게 찾아왔다. 2021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강화로 이주한 지 24년, ‘강화나들길’도 숱하게 걸었다. 그러니 돈대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었지 가슴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다.
‘인화돈대’를 찾아갔을 때였다. 돈대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른 체 무작정 찾아 나섰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범의 해를 앞두고 인화리 뒷동산에 있는 범 바위를 찾아 나섰던 길이었다. 눈에서 불을 뿜는 범이 웅크리고 있는 마을이라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이야기란 말인가.
인화리(寅火里)는 강화도 서북단 끝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다. 동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반도가 바라보인다. 그래서 예전에는 연백으로 가는 배가 인화나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바닷가 쪽으로 튀어나온 높다란 언덕의 큰 암반 위에 커다란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풀쩍 뛰어올라 바다를 건널 기세였다. 검은색의 바위 색깔하며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범이었다. 지긋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범을 보니 왜 이곳이 '인화리'인지 알 것 같았다.
범 바위 근처에 인화돈대가 있었다. 돈대라고 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의 기단석이 이곳이 과거 돈대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 나무와 잡풀들이 어지러이 나있는 황량하고 스산한 빈 터였다.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져간 돈대의 역사가 느껴졌다. 시간의 묵은 때가 묻어있는 듯한 돈대 터에서 350년 전 과거를 그려 보았다. 돈대를 쌓느라 피땀을 흘렸을 선인들의 노고가 느껴졌고 돈대를 지키느라 춘하추동 사계절을 보냈을 병졸들의 외로움과 수고로움이 마음에 다가왔다.
황량하기까지 한 인화돈대 터를 서성댔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인화돈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돈대의 부름을 받았다.
숙종, 강화를 품다
돈대는 조선 숙종 때 대부분 축조되었다. 강화도의 54개 돈대 중에 52개가 숙종 때 만들어졌으니, 숙종을 강화도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이용한 사람이라고 지칭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숙종이 즉위했을 때는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지 30여 년이 지난 때였다. 나라는 아직도 전란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숙종의 증조할아버지인 인조 임금은 청나라 장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했다.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도 왕자 시절에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능욕을 당했다.
숙종은 선대 임금들이 당했던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조의 보장처이자 국가 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를 요새화했다. 강화산성을 쌓고 외성(外城)도 정비했다. 또 강화도를 한 바퀴 두르는 48개의 돈대를 쌓았다. 이후로도 4개의 돈대를 더 만들어서 54돈대 중 52개소가 숙종 때 축조되었다.
숙종 4년(1678) 10월에 왕은 병조판서 김석주를 강화로 보낸다. 김석주는 강화도의 지세를 두루 살피고 돈대를 쌓기에 적당한 위치를 지도에 그려 왕에게 보고한다. 그는 49개의 돈대를 축조할 것을 건의했지만 불은평(佛恩坪)은 제외됐다. 불은평이 바닷물이 깊이 들어오는 지역이지만 오두돈대와 광성보 사이가 서로 잘 보이고 또 평평하기 때문에 굳이 돈대를 축조할 필요성이 없다 여겼던 것이다. 이로써 총 48개소의 돈대가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돈대를 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들어왔다.《비변사등록》에서 보면 돌을 쪼개고 다듬는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도 50여 명이 왔다. 그들을 돕는 일꾼들까지 합하면 총 1,400여 명이 돌 작업을 하러 숙종 4년(1678) 음력 12월에 강화로 왔다.
돌을 실어 나르는 배도 75척이나 동원되었다. 각각의 배에는 사공 한 명과 사공의 일을 돕는 격군 두 명이 있었으니 돌 운반선에만 해도 220여 명의 사람이 필요했다. 돈대를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만도 1,600여 명의 사람이 필요했다.
성벽을 쌓기 위해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도의 승군(僧軍)들이 동원되었다. 숙종 5년(1679) 1월 13일의《승정원일기》를 보면 돈대를 축조하기 위해 전라도 2,800명, 충청도 1,800명, 강원도 500명, 함경도 400명의 승군을 동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해 2월 27일에는 강화 유수가 마니산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돈대 축조의 순탄함과 안전을 빌며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리라.
시간이 남겨놓은 흔적
공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바닷가의 산자락 끝이나 곶(串)의 평탄지 상부에 돈대를 축조했는데 그곳까지 돌을 나르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와 수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돈대들을 만들 때는 더 어려웠다. 물렁한 갯벌을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예상했던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자 어영군 4,000여 명이 더 투입되었다. 돈대를 쌓기 시작한 지 석 달이 조금 못 되어 마침내 돈대들을 다 축조하였다. 3월에 시작한 공사를 5월에서야 마칠 수 있었다. 강화도의 돈대 축조는 돌을 깨고 나르는 채석 시점부터 본다면1678년 12월 1일부터 1679년 5월 23일까지, 약 반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던 셈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화도를 요새화했다. 다시는 적으로부터 나라를 침탈당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돈대에 어려 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80여 일 만에 무려 48개의 돈대를 만들었을까.
조상들이 피땀으로 쌓은 돈대다. 돈대의 성벽 돌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이끼 낀 석축을 따라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월의 흐름 속에 돈대는 허물어지고 잊혀졌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돈대에는 시간이 남겨놓은 흔적이 있다. 시간은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흔적이 되어 남았다. 시간의 흔적을 돈대에서 본다. 돈대는 변경의 역사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