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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영 Dec 08. 2021

미끄러지는 마음

 몇 년 만에 교실에 앉았다. 어릴 적부터 창가 자리를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창가 자리는 아니지만, 초록 잎들이 바람을 타고 햇빛을 가르는 것은 볼 수 있다. 완연한 여름이다.


 이제는 조금 작아진 책상에 앉아 생각을 한다. 긴긴 수험생활의 끝이 조금은 보이는 날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에 빠졌다. 사람들과의 소식을 끊고 살았기에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마치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사람처럼 소감문을 읊어본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합격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공부 걱정 없는 밤을 보낼 테야. 부모님을 모시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거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야지. 아마 나는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거야. 그간 공부했던 책을 쌓아두고 사진을 찍어야지.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는다.

 

 합격의 순간에서, 수험생활을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다. 둥그런 달이 밝은 날 밤이었다. 집에서 혼자 저녁을 대강 먹고, 영어 단어장을 보며 15분 거리의 송파도서관으로 갔다. 전날 눈이 많이 왔는지 길은 얼음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나에게는 언 길을 조심히 걷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렇게 몇 번 넘어질 뻔한 위기를 겪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동료들이 많아서였다. 나 혼자만 이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금세 밤 10시가 되었다. 엄마에게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도서관 앞으로 데리러 왔으니 같이 들어가자.’ 밤길이 늦어서 데리러 오신 것 같았다. 오늘 해야 할 공부를 다 하지 못 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조급하게 했다. ‘얼른 집에 가서 자기 전까지 책을 보다 잠들어야지.’ 엄마는 도서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려 준 엄마에게 빨리 가서 씻고 책을 봐야 하니 먼저 가겠다고 하며, 얼음이 언 오르막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엄마가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영어 단어 한 개라도 편히 더 봤을 텐데 생각하며. 달은 아주 밝게 떠 있었고, 찬 공기는 나를 더 오므리게 했다. 단어를 곱씹으며 걷다 발이 살짝 미끄러질 뻔했다. 문득, 뒤돌아 멀리서 뒤따라오는 엄마를 봤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오면서도 내가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키가 작은 엄마의 모습이 왜인지 더 작아 보였다.


 나는 이상하게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딸의 뒷모습을 보며 언 길을 홀로 걸어와야 했을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리고 고작 영어 단어 몇 개가 뭐라고, 입김이 풍선을 만들어 내는 겨울날 엄마를 등졌던 내가 조금은 밉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면접 번호 9번, 면접 대기하세요.’ 매미가 울었고 나는 교실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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