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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필 Feb 22. 2019

머트씨 당신은 어떤 이유로 변기를 예술이라며 내놓았나요

어느 선선한 가을, 나는 책상 아래로 만화책을 넘기다 ‘변기’라는 말에 시선을 책상 위로 돌렸다. 미술에 흥미가 생겼다기보다는 변기라는 단어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때 나는 어쩐지 똥 얘기와 상스러운 욕설에 깔깔거리며 웃곤 했으니까. 어쨌든 짧게 지나가는 말로 들은 그 변기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그러나 더 이상의 이야기나 궁금증은 없었고, 나는 다시 시선을 만화책으로 돌렸다. 이것이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의 변기 ‘샘’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이다.


2018년 12월, 한국에 그 유명한 소변기가 왔다. 실제로 보는 건 꼭 두 번째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 변기의 이름은 ‘샘(Fontaine, 1917)’, 리처드 머트(R.Mutt, 이하 머트, 뒤샹이 출품 당시 사용한 가명)씨가 만든 ‘작품’이다. 그는 독립미술가협회에서 주최하는 전시에 이 변기를 출품했지만,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았다고 한다.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기성 제품이었기 때문. 당시 사람들에게 샘의 가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훗날 미술작품의 판단 기준이 눈에서 머리로 이동함에 따라 이 변기는 ‘다다이즘’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변기이자 ‘작품’이 된다.


머트씨는 어떤 이유로 변기를 예술이라며 내놓았을까?


1.     변기를 좋아하는 사람

애정, 우선은 애정 할 일이다. 나는 절대로 머트씨가 돋보이고 싶다는 얄팍한 마음으로 전시장에 변기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소위 말하는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없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분명히 그는 변기를 진심으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어떤 이유로든 변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이다. 애정을 가지게 되면 당연히 변기를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과 어느 면에서나 빛나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을 지도,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이 알 수 없는 미학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 이상, 적어도 머트씨의 세상에서만큼은 변기는 화장실을 벗어나도 좋다. 설령 그곳이 미술관의 흰 벽일지라도.


2.     변기가 중요한 사람

머트씨의 삶에서는 변기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특히, 그가 배관이나 수도시설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변기의 소중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며칠만 시골에서 지내도 우리는 화장실의 악취와 불편함에 치를 떨며 수세식 화장실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그에게 변기라는 단어로부터 비롯된, 누군가 엉덩이나 성기를 들이민다는 상상은 군더더기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변기가 더럽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우리가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핸드폰이 변기보다 더러운 줄도 모르는, 언제나 달의 한쪽 면만 보며 사는 우리를 타이를 일이다.


3.     변기를 ‘보는’ 사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기에 관심이 없다. 그 이유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한다기보다, 변기가 생각할 만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먹는 일이 급한 우리의 삶에서 내보내는 일의 의미는 딱 그 정도다. 하지만 머트씨는 조금 달랐다. 그는 변기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는 이 딱딱하고 매끈하고 하얀 물체를 관심을 가지고 보았(look)다. 그리고 생각했으며 기억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면, 세상 그 무엇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머트씨가 변기를 미술관까지 끌고 올 이유는 전무하다.


“나는 예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술가들을 믿지 않는다.” –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현재 샘(Fontaine, 1917)은 철저히 ‘예술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그간 많은 사람들이 쌓아온 두꺼운 겉포장이라고 생각한다. ‘변기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머릿속에 남아, ‘샘 = 예술작품’이라는 공식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공식에는 여지가 없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뒤샹의 변기(샘)’는 그가 변기, 더 나아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가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온 이유는 ‘이것이 내 세상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변기가 정말로 아름다워요’라던가 ‘이제부터 변기도 예술작품입니다’ ‘이것이 레디메이드(ready–made)입니다’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것은 예술작품보다 차라리 문학에 가깝다.


변기를 전시장에 놓으면 나도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나는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변기를 봤다. 한참을 봤다. 이것은 마치 자백과 같았다. 내가 변기를 예술이라는 잣대로만 보았음을 깨닫고 당신의 용기와 생각을 인정한다는 자백. 동시에 시대의 예술가 뒤샹을 마주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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