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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필 Mar 01. 2019

피크닉 그리고 재스퍼 모리슨

이제 막 예술이라는 터널에 들어선 나의 눈에 ‘디자인(design)’이라는 말은 저속하게 들렸다. 숭고한 무형의 가치를 창출하는 예술에 비해 디자인은 상업적이고 보편적이었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학부시절 전공과 함께 곁다리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도 그 가치를 무시했고 단순히 수단으로 생각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숭고한 까닭에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지만, 그땐 내 삶을 예술로 느끼는 오해를 했다. 가장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난 달의 한쪽 면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던 것이다. 내 세상은 그렇게나 좁았다.


디자인에 관련한 전시를 보지 않은 이유는 순수예술이 더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버릇에 가까웠다. 예술과 디자인을 구분하는 엉성한 잣대와 신념이 낳은 버릇이다. 피크닉에서 열리는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 1959~)의 전시를 보러 가자는 친한 형의 제안에 선뜻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양말을 신은 이유는 나에게는 일종의 일탈이었다. 이 글은 그 일탈에 대한 이야기다.


디자인에 대한 전시지만 나는 이 리뷰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도슨트는 듣지 않았다.




피크닉(piknic)이라는 공간


이 전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피크닉이라는 공간을 꺼낸 이유는 명료하다. 다른 곳도 아닌 피크닉이기 때문. 남산 변두리의 작고 낮은 집들 사이에 자리 잡은 피크닉은 지난해 개관 이후부터 인스타그램을 타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hot)한 공간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꼭 전시가 아니더라도 가봐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처음 방문한 피크닉은 한눈에 봐도 좋았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화이트&베이지 톤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감성이 한껏 묻어나는 카페도 멋졌다. 안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아기자기한 굿즈 판매점을 갖췄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사랑받을만한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후자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그 자체로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네요 당신!

많은 전시가 작품의 배경과 지식의 전달에 역점을 두고, 작품을 통해 작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 반대다. 한 사람의 가치관과 이야기를 통해 작품을 말한다. 즉, 이 전시의 목적은 작품보다 사람이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시의 개요나 공간의 테마가 아닌, 재스퍼 모리슨의 이야기다. 작품 설명을 보자.


세 개의 녹색 병(Three Green Bottles, capellini, 1988)

‘나는 손으로 잡고 불어서 만드는 유리 가공 방식으로 병 세 개를 만들고 싶었지만, 당시 베를린에는 그런 방식으로 유리를 가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 평범한 와인 병을 가져다가 변형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훨씬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마치 “평범한 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좀 봐. 디자인된 것보다 낫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전시에서 작품 설명을 딱딱하게 사용한다. 정보의 전달이 목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 전시에서 설명은 작품에 대한 정보 전달을 넘어, 작가의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한다. 상술한 것처럼 대화체를 사용하고 위트 있는 내용을 넣는다던지 실제 상황과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재스퍼 모리슨은 나에게 꽤 재미있고 엉뚱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 내용은 사소하나 결코 가볍지 않은 디자인을 닮았다.


피곤하지 않은 전시

전시에는 작품이 많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는 후기를 남겼지만, 나는 ‘피곤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기대하고 전시를 방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전시장에서 작품에 오래도록 눈길을 주는 경우는 적다. 오히려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눈보다 카메라 렌즈다. 많은 작품은 그저 기획자에게는 관리와 배치의 문제를 주고 관객에게는 휴대폰 용량과 찰칵 소리로 스트레스를 줄 뿐이다. 따라서 양쪽 모두에게 피곤한 일이다. 


전시는 바로 이 부분에서 좋았다. 작품의 수를 줄이고 그 외에 다양한 요소를 넣었다. 그 요소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굿즈 샵과 쇼룸이다. 처음에 나오는 전시장을 지나면 작가가 촬영한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그 옆으로 굿즈 샵이 마련되어 있는데, 독특한 점은 이곳 역시 전시의 일부라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디자인 상품을 만드는 재스퍼 모리슨의 직업을 전시의 연장으로 둔 것이다. 실제로 한편에는 다른 전시 공간과 마찬가지로 굿즈 샵에 대한 설명이 있다. 때문에 나는 이러한 형식 자체가 ‘독특하다’라기보다는, 디자인의 정체성이 느껴져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바로 위층에서 본 쇼룸 역시 좋았다. 사실 좋은 디자인이란 딱딱한 유리나 아크릴 속에 넣어두고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했을 때 삶의 질을 높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쇼룸은 작가의 작업물을 직접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사실 전시의 끝자락에서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예술이 사람의 생각을 표현한 작업이라면, 디자인은 사람의 생활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이 전시가 디자인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기획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에서 친근한 방식으로 안정감 있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다. 물론 내가 적은 이야기는 기획자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점에서 좋았다.



2018년 11월 16일부터 2019년 3월 24일까지. 오전 10시 ~ 오후 7시. 일반(20세 이상) : 15,000원, 청소년(14 ~ 19세) : 12,000원, 어린이(13세 이하)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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