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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필 Mar 23. 2019

미술 그리고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직까지 이 질문에 100% 신뢰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은 사람은 없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아마 각자가 가지는 사랑의 정의가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고 지치는 것이 사랑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대하게 되고 행복한 것이 사랑이니까. 결국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이고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은 그만큼 복잡하고, 신비롭고,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세상 모든 사건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물론 미술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모든 미술이 사랑 때문에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랑 없이 지금의 미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미술학자들과 미술평론가, 미술가, 더 나아가 미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감히, 사랑은 미술, 더 나아가 창작이라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미술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증오의 감정에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며, 비평이란 근본적으로 그런 것이라 믿습니다.’ – 로버트 로젠블럼


물론 우리는 미술가와 그 사람의 사정과 시대를 모두 알지 못하기에, 그림만 보고 섣부르게 모든 상황을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림에서 사랑을 확인할 명백한 증거도 없다. 게다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이때 필요한 건, ‘한번 해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작품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끝내 바라볼 수 없다면 ‘사랑일 거야!’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어쩐지 대충(?)하는 느낌이지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분명 그림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사랑이 어떻게 작품의 이유가 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물론 개인적인 시선이다. 하지만 이 시선이 누군가의 감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당신이 좋은 이유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면 자주 바라보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이 특징은 우리의 시선과 표현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낸다. 자주 보면 보이지 않던 부분까지 볼 수 있게 되고, 끊임없이 생각하면 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우리는 대상을 좋아하지 않기 힘들다. 당신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려보라. 사소한 것조차 그 사람의 장점이 되고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영화 ‘500일의 섬머’ – “섬머를 사랑해. 그녀의 미소를 사랑해. 그녀의 머리칼이나 그녀의 무릎도 사랑해. 목에 있는 하트 모양 점도 좋아하고 그녀가 가끔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웃음소리도 좋고 그녀가 잘 때 보이는 모습도 좋아. 섬머 덕분에 내가 마치 어떤 일이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아. 뭐랄까, 인생이 가치 있는 거라는 생각 말이야.”


고흐 ‘정오의 휴식’ – 고흐는 땀에 젖은 채 짚더미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농부의 모습에 애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곤 그 모습에 빠져 그들이 어떻게 누워있는지, 신발은 신고 자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는지, 지푸라기는 어떤지 등 농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모드 루이스 ‘마차 운전’ – 영화 ‘내 사랑’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모드 루이스는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감동시킨 건 그들의 섬세한 표정이나 자연의 세세한 부분이 아닌 사물의 색과 평범한 것들의 조화였던 것 같다.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 누군가의 친절한 인사, 새로운 소식 그리고 반갑게 웃어주는 누군가의 얼굴에 담긴 것은 단지 평범한 일상이지만,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삶을 쌓아 올린다. 가끔은 특별하거나 불행하고, 대부분은 아무렇지 않게.




2.     사랑은 변하는 거야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사랑이 변하듯 미술가와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것의 표현 방법은 과거와 현재가 매우 다르다. 또 같은 시대라 해도 개인의 특성이나 경험에 의해 미술가는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다. 가령 과거의 사람들이 추(醜)하다고 느꼈던 식사하는 장면이 지금에 와서는 인스타그램을 도배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도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브뤼겔 ‘시골의 결혼잔치’ – 브뤼겔이 이 작품을 그렸을 당시, 사람들은 음식 먹는 모습을 추하다고 생각했었다. 작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즐겁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생각이 변했던 것 같다. 


르누아르 ‘수프를 먹는 코코’ – 르누아르는 음식을 먹는 아이의 모습을 정말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아이의 모습을 보면 사랑스러움에 녹아버린 르누아르의 눈빛이 떠오른다.


베르메르 ‘부엌의 하녀’ – 베르메르는 우유를 따르는 하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분위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단지 한 명의 하녀였지만, 베르메르는 시(詩)의 주인공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 노인과 소년

여기 한 명의 노인이 있다. 노인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이마가 넓고, 머리는 백발이다. 코에는 피부병이 있는지 사마귀 같은 것이 한가득 나 있다. 아래에는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소년이 있다. 풍성하고 윤기가 흐르는 금빛 머리칼에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소년 역시 붉은 옷을 입고 있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눈을 쳐다본다. 할아버지 역시 소년을 쳐다본다. 창 밖에는 평화로운 풍경이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할아버지와 아이는 매우 다르다. 나이부터 생김새까지 하나같이 대비를 이룬다.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의 코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쩐지 이 그림은 사랑의 표현처럼 보인다. 달리 이유는 없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필자가 할머니 손에 자란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4.     잘 지내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지독한 아픔에 대비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에 언제나 착각에 빠져버리기 쉽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사랑이 늘 아름답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사랑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아프지만 견뎌야 했고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었던 이야기, 그림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장 밥티스트 르노 ’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는 디부타테스’ – 여성은 남성과 곧 헤어질 것이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자를 선택했다. 그리곤 그림자를 따라 벽에 선을 긋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 중 작가가 이 이야기를 고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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