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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Nov 26. 2020

103동의 히어로 (Fiction)

 집을 나서려는데 거실 탁자 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눈길이 갔다. 고등학교 때 읽다가 포기한 책이었다. 

 "엄마, 저거 엄마가 산 거야?" 

 "응. 왜?" 

 "아냐."

 나는 현관문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아저씨는 항상 하루키 책을 읽고 계셨다. 이전에 계셨던 아저씨는 날 보면 언제나 인사해 주셨지만, 새로 오신 아저씨는 어쩐지 조용하신 편인 것 같았다. 늘 독서에 집중하고 계셔서 말 걸기도 힘들었다. 일어나 계신 모습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주민들은 아저씨가 아파트 경비 일을 안 하고 책 보러 온 것 같다며 민원을 넣는 사람도 있었다.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자기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비실에 쌓이는 택배를 정리 안 해놓으시는 날도 없었고, 단지 안에 쓰레기 하나 떨어진 모습도 못 보셨다. 게다가 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졸졸 쫓아오던 남자를 먼저 알아보시고 바닥에 쓰러뜨려 제압하신 적도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그렇게 건장한 체격이라는 걸 처음 봤던 것 같다. 

 집에서 하루키 책을 봐서인지, 어쩐지 그날은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에 집중하셨다. 어쩐지 머쓱해진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야근 때문에 밤 열 시가 다 돼서야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파트 주변이 시끄러웠다. 경찰차와 구급차 몇 대가 서 있었다. 웅성거리는 아파트 사람들 사이에 엄마가 서있는 게 보였다. "엄마!" 엄마는 나를 돌아봤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 옆집 사는 그 아저씨 있잖아. 맨날 술 먹고 1층에서 난동 부리던." 

"응"

 "그 아저씨가 자기 집에서 불을 낸 거야."

 "뭐?! 엄마 괜찮아?"

 "응 엄마 괜찮은 거 네가 보고 있잖아.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통하게 경비 아저씨가 우리 집 현관 벨을 눌러주셨더라고. 빨리 나오라고. 그때 엄마가 자고 있어서 못 들었는데 현관문을 쾅쾅 치면서 급하게 부르시더라니까."

 다른 주민들은 아저씨의 빠른 인터폰 덕에 다들 1층으로 내려왔고, 엄마는 오늘따라 일찍 잠이 들어 집안에서 자고 있었다고 했다. 이미 베란다 창문으로 까만 연기가 나갈 정도로 불씨가 커지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나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러 올라간 것이었다. 대단한 건, 자해를 하고 집안에 쓰러져있던 옆집 아저씨를 데리고 나오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숨이 붙어있는 거라고. 

 아저씨는 멀찌감치 서서 상황이 정리되는 걸 보고 계셨다. 예순이 가까이 되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키와 등치, 염색은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증명하는 백발을 하고 여길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우리 아파트의 영웅 같았다. 구급차에는 옆집 아저씨가 실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감사 인사를 해아 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 구해주셨다면서요."

 "아녜요. 그냥 나오라고 부른 것뿐이지요."

아저씨는 부끄러우신 건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하루키 책을 읽었다. 기사단장 죽이기였다. 옆에 쌓인 책들에는 동양 도서관의 마크가 찍혀있었다. 

 다음 날 퇴근하면서 하루키 책을 잔뜩 사들고 집 앞으로 왔다. 아저씨는 여전히 책을 읽고 계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여전히 날 보고 끄덕이고는 다시 책을 읽으셨다.

 "저기, 어제 감사하기도 해서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하루키 책 열 권을 아저씨에게 드렸다. 아저씨는 멀뚱히 바라보다, "고맙습니다."라며 책을 받으셨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옅게 미소를 띤 것 같기도 했다. 예전에 아저씨가 스토커를 제압해 주셨을 때도 고마워서 엄마가 해준 반찬 여러 가지를 갖다 드렸었다. 아저씨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런데 하루키 책을 받는 아저씨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저씨, 근데 왜 하루키 책만 읽으시는 거예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제 아내가 생전에 좋아하던 작가예요. 정작 그땐 책이라는 걸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았었지요. 이제야 아내가 하루키의 뭘 좋아했는지 알고 싶어 져서 읽고 있어요."

 아저씨의 대답을 듣고는 조금 숙연해진 분위기 탓에 얼떨결에 "아, 네 수고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올라왔다.


 얼마 후, 경비 아저씨가 바뀌었다. 또 누군가 민원을 넣은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그렇게 근무한 지 여섯 달이 안 돼서 아파트에서 나가셨다. 관리 사무소는 1년 계약 때까지는 근무해도 된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어느 날 사라지셨다. 아저씨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써서 엄마에게 전해주고 떠나셨다.

 ' 책 고맙습니다. 하루키 책 상실의 시대에서,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지요. 비스킷 통 안에 여러 가지 중 좋아하는 것만 먼저 먹으면 나중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고요. 저는 젊었을 때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 좋은 것만 남은 것 같더군요. 아내가 죽고 깨달았지요. 그런데 때론 1003호 아가씨가 베푼 호의처럼 좋아하는 비스킷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다행이더군요. 덕분에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루키를 만나러 일본에 가볼 생각이에요. 더 이상 읽을 책이 없거든요. 고마웠습니다. 잘 지내십시오."

 아저씨가 남긴 편지였다. 나는 아저씨에게 좋아하는 비스킷이었다. 나 역시, 아저씨는 내게 최고로 행복한 맛의 비스킷이었다. 엄마가 다 읽은 상실의 시대를 꺼내 들어 첫 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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