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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나의 봄

소정의 일상 큐레이팅

by 별빛소정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따뜻하고 눅진한 육수로 속을 덥히고, 문을 나서자 봄햇살이 거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잠깐 걸어볼까. 발길을 천천히 옮겼다. 걸치고 있는 두꺼운 재킷이 어색할 만큼 봄기운이 가득했다.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걷다 보니 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아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말 봄이 와버린 걸까? 나무 가득 꽃이 필 동안 내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 길은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지나는 길이다. 혹시 하룻밤 새 나무가 꽃망울을 한가득 터뜨린 걸까?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커피를 들고 걷는 내 그림자가 생경해 보여 또 한 장, 찰칵. 거리는 봄으로 가득한데, 내 그림자는 아직 겨울 끝 어느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이제는 나도 몸에 달라붙은 겨울의 군내를 털어내고 새봄을 맞아야지. 아무 준비 없이 봄이 온 것도 모르고 여름을 만나버리면 낭패다. 나는 늘 그렇게 봄을 흘려버렸다. 아직 겨울인 줄만 알고 두꺼운 코트에 몸을 웅크리고 바닥만 보다 고개를 들면, 봄은 이미 순식간에 지나가고 없었다.


이번 봄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 결심한다. 조금 춥더라도 봄옷을 모두 꺼내 입어야지. 매화도, 동백도, 산수유도, 벚꽃도 차례대로 눈에 담을 거야. 마른 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연두가 짙은 초록으로 변하는 순간을, 꽃잎이 흩날려 눈처럼 내리는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거야. 파릇한 쑥을 넣어 끓인 도다리쑥국도 꼭 먹어야지.


하얀 목련이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날, 새처럼 날아가 사랑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고 초록이 번지는 들판을 쏘다녀야지. "만개한 꽃잎보다 네가 더 예뻐"라고 속삭여 줄게. 흐드러진 꽃동산을 배경으로 인생샷도 찍어줄게. 네 평생 가장 아름다운 봄을 만들어줄게.


인간에게는 기껏해야 백 개의 봄밖에 찾아오지 않는데, 녀석의 이름에 만 개의 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름 말고 녀석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녀석에게 발레를 가르친 선생님이야 그렇다 치고 외부사람 중에서는 아마도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봄을 맞아 온다 리쿠의 <스프링>을 읽기 시작했다. 이름에 만개의 봄을 지닌 요로즈 하루. <Spring>이라는 책 제목이 주인공의 이름에서 나왔나 보다. 만개의 봄을 지니고 꽃처럼 춤을 추는 하루, 그의 발레는 어떤 언어로 피어날까. <꿀벌과 천둥>에서 피아노 선율을 글로 풀어낸 것을 읽고 그녀의 문장에 푹 빠져들었다. '온다리쿠 30주년 기념작, 소설의 한계를 초월한 마스터 피스'. 설레임을 안고 책을 펼쳤다. 새 봄에 읽는 <스프링>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잖아.


설레임, 그리움, 향기로움. 봄을 닮은 단어들을 적어놓고 단어 속에서 봄 향기를 맡아본다. 올해는 봄을 그냥 스쳐 보내지 않을 거다. 순간을 기억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찬란한 시간 속에서 나를 새롭게 피워낼 거다. 나의 시간, 나의 설렘, 나의 하루하루를 이 계절에 꼭꼭 눌러 담아 오늘을 더 깊이, 더 진하게 살아가야지.


그대도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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