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의 일상 큐레이팅
"아... 아... 안녕하테요."
나는 말더듬이였다.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면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첫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겨우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발음은 어눌했고, 갈매기 소리를 낸다고 놀림을 받았다. 내 언어는 머릿속에서만 맴돌았고, 좀처럼 입 밖으로 드러내지지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어 몇 번이고 연습했다. 글을 말로 옮기는 것에는 늘 용기가 필요했다. 말은 늘 불편했다.
글쓰기는 내 마음이었다. 쓰고 나면 마음이 생겨났다. "봄이 왔다"라고 적으니, 내 안에도 봄이 피어났다. 그 뒤에 말은 봄이 와서 하고 싶은 것들이 적혔고 봄이 와서 그리운 사람들이 떠올랐다. 글을 쓰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큰 숨을 쉴 필요도, 몇 번이나 연습할 필요 없이 글은 그냥 흘러나왔다.
쓰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쓰고 나니 내가 되었다. 세상을 느끼고,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고 나서야 내 안에 말들이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하나씩 밖으로 꺼내 쓰면서 나는 자라났다.
이리저리 얽히고 흩어져 있던 말들을 꺼내 적으니 자꾸자꾸 이어져 나왔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 의사를 전달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지만 말은 늘 어렵고 고단한 일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감정. "봄이 왔다"라고 쓰자 내 마음속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초록이 돋아났다. 그동안 내가 기다려온 것이 봄이었구나 느껴졌다.
쓰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조화로움이었다. 내 안에 엉망으로 얽혀있던 말덩어리들의 시작점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글로 적자, 언어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짜이고 엮여서 옷이 되고, 무늬가 되고, 한 폭의 타피스트리가 되었다. 나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해가 글이 되었고, 먹은 밥이 글이 되었다. 대화가 글이 되었고, 읽은 책이 또 다른 글이 되었다. 쓰지 못했다면, 말이 되지 못한 미완의 언어들은 무엇이 되었을까.
이제 나는 말을 더듬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말을 꺼낼 때면 숨을 들이쉬고, 눈동자를 굴리고, 목구멍에 걸린 첫 단어를 턱 뱉어낸다. 머뭇거림과 함께 첫 단어를 뱉어내야 다음 말을 이을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했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아마도 오늘처럼 가을비 내리는 날, 릴케도 문득 존재의 문을 여는 열쇠를 빗방울 사이에 꽂아 넣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빗방울을 헤아리고 있는 내게 릴케의 저 말이 선명하게 떠오를 리 없다. 하다못해 빗방울마저도 존재의 흔적을 남기려고 유리창에 상형문자를 그린다. 산다는 건 눈물겨운 일이지만, 아름답다고 쓰고 나면 문득 비가 그치고 햇살이 쏟아지고 무지개가 떴다. 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 림태주 <오늘 사랑한 것>
"오늘도 살았습니다."라고 쓰니 살아졌고, "오늘도 행복했습니다."라고 쓰니 행복해졌다. 글은 내 생각을 만들고, 내 감정을 만들어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더듬이가 될지 모른다. 흔들리고 길을 잃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쓴다. 비가 오면 비를 적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적고 마음이 아리면 아픔을 적는다. 내 안에 들어찬 언어의 조각들을 이어 글을 짓는다. 써야만 내 안에 가득 찬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기에, 써야만 비워져 온전히 나로 남을 수 있기에, 나는 오늘도 그냥 쓴다.
나는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