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을 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취미로 수준 이상의 결과를 원한다면, 그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시를 한 줄 적는 것도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예술에 임하려면 몸과 마음이 불처럼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대의 영혼과 인생 전부를 창조에 걸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무언가를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나아가 열매를 맺기는 어렵습니다. 헤세는 어중간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이루기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책을 쓰려면 작가의 삶을 살아야 하고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 사색하고 시어를 고르며 일상의 틈새에서 예민하게 시상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기술만 익힌 글쓰기는 치열한 경쟁 속에 매몰될 뿐입니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불꽃이 되어 매달릴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헤르만 헤세의 문장을 필사한 지 76일째, 드디어 마지막 문장을 만났습니다. 헤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돌아가라'라고 손짓합니다. 익숙한 세상을 깨고 나아가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알을 깨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파괴의 끝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 다시 탄생합니다. 책으로 배운 지식은 타인의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사색을 거쳐 온전히 체화될 때 비로소 내 것이 됩니다.
오늘로 필사 401일을 맞이했습니다. 괴테를 거쳐 비트겐슈타인과 니체를 지나 헤세에 도달했습니다. 매일 문장을 옮겨 적고 깨달음을 기록하는 일이 늘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필사는 매일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철학자의 문장을 나의 문장으로 바꾸며, 아침에 적은 한 줄을 온종일 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생각과 언어의 깊이가 더해졌습니다. 눈앞의 현상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고요의 시간을 거치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정보로 두껍게 덮인 에고의 껍질을 부수려 합니다. 고정된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텅 빈 허공 속에 머물며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세상이 주입하는 지식에서 벗어나 내 안의 본질적인 깨달음을 찾으려 합니다. 필사와 사색을 통과하며 나의 영혼은 한 걸음 더 가벼워졌습니다.
401일의 여정 끝에 남은 것은 명쾌한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가벼워진 비움입니다. 텅 빈 캔버스 위에 새로운 필사로 나만의 문장을 다시 새기겠습니다.
어제의 나를 파괴하고 오늘의 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세상에 아직 없다고? 그럼 내가 만들면 되지, 그게 이미 존재한다고? 그럼 내 스타일로 바꾸면 되지.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당장 하는 게 좋다. 미루는 것은 좋지 않다. 내일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