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미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이다.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은은한 종이 냄새를 맡고, 조용히 책 사이를 거닐 때마다 마치 시간과 공간을 잊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문득, 책과 책 사이의 좁은 틈에서 누군가 첫눈에 반할 사람을 스치듯 만날지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까지.
내가 도서관에 처음 반하게 된 건 25년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종합자료실과 공부를 위한 열람실로 나뉘어 있었다. 도서관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주말마다 열람실 자리를 잡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서관은 공부하거나 책을 빌리는 곳일 뿐, 여유롭게 책을 읽을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 대학 도서관은 그런 내 편견을 완전히 깨뜨렸다. 넓게 펼쳐진 서가와 곳곳에 놓인 편안한 탁자, 그리고 부드러운 간접조명에 1인용 스탠드까지 모든 게 새로웠다. 그중 나의 눈에 띈 자리는 가죽으로 만든 안락의자로 마치 고급스러운 서재에서나 볼 법한 특별한 자리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가죽의 포근함이 온몸을 감싸 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그 분위기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책이 절로 읽어지는 듯 마법 같은 자리였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도서관이 생겨, 누구나 자유롭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동네마다 작은 도서관들이 열풍처럼 생기고 특별한 테마로 만든 도서관도 늘어나고 있다. 도서관은 더 이상 공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휴식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독서 외에도 인문학 강좌, 작은 콘서트,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리며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열람실과 자료실의 구분이 없어지고 서가 옆에 편안한 의자와 탁자가 있어 누구나 책을 펼치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도서관을 좋아해 자주 도서관을 가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유펜에서 보았던 그런 안락한 가죽소파를 그리워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내어 새로 문을 연 부산 국회도서관을 찾았다. 높은 천장과 넓은 로비, 풍성한 서가와 책들까지, 국회도서관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가 본 도서관 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1층에는 종합 자료실과 어린이 자료실, 로비와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설 전시인 ‘국회, 나라의 뜻이 모이다’와 ‘문자: 경계를 넘다’ 특별 전시도 흥미로웠다. 특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작품들이 다양한 언어로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2층의 주제 자료실과 의회 자료실을 둘러보며 곳곳에 놓인 소파와 책상에서 독서와 공부에 몰두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취준생들 사이에서,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푸른 하늘과 가을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서 읽고 있던 '모스크바의 신사'를 펼쳤다. 멀리 가을 풍경을 곁눈질하며 읽는 책장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울고 웃으며 몰입하던 나는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며칠간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내느라 눈이 피로했지만, 이곳에서의 독서는 그야말로 힐링 그 자체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일어나 나의 취미생활 서가산책을 시작했다. 1층으로 내려와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전시실과 어린이 도서관까지 구석구석 탐험했다. 알록달록한 의자와 책 읽는 아이들, 엄마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잠시 밖으로 나가 보니 억새가 가득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그곳 야외 벤치에 앉아 가을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의회자료실을 둘러보던 중, 내 눈을 의심했다. 바로 그곳에, 25년 전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비록 조명은 환한 LED 불빛이었고 전용 스탠드는 없었지만, 가죽으로 만든 1인용 소파가 놓여있었다.
나는 얼른 책을 가져와 그 자리에 앉아 은은한 가죽냄새를 맡으며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정말 마법처럼 책이 술술 읽히며 그 자리는 나에게 25년 전 유펜 도서관에서 느꼈던 아늑함을 그대로 선사해 주었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그 정도 수준이 된 것이다. 도서관에 가죽소파를 설치할 정도의 여유로움.
도서관은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자, 나에게는 소중한 휴식의 공간이다. 조용한 도서관의 소리들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 소리, 책장 넘기는 사그락사그락 소리, 누군가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타닥타닥 소리까지. 그 작은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지만, 국회부산도서관에서 오늘 하루 나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락의자와 함께, 도서관에서의 특별한 시간은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