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1. 우물쭈물하다 이 꼴 날 줄 알았지.
미국 극작가의 묘비에 적혔다는 문장이다*. 짧다. 다만 울면서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 꼬락서니엔 딱 맞다. 쇠털같이 많던 나날들은 누가 훔쳤을까. 변명할 처지는 못 된다. 문자는 2주일 전 왔다. 트레바리 모임에 오려면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책을 읽고는 있느냐는 채근이다. 제목을 봤다. '미루기의 천재들'. 순간 생각했다. '책 제목에 걸맞게 딱 모임 전날 독후감이란 걸 쓰면 되겠구나.' 무의식이 귀에 속삭였다. 너는 글렀어. 물론 잘 안다. 조만간 이 꼴이 되리란 사실도.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 느낌.
독자에게 웃음을 주는 책은 많다. 다만 '주제'만으로 웃기는 책은 드물다.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것, 또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또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것(169p)." 그렇다. 미루기다. '게으름 피우면 소 된다'라는 우리네 문화에서, 미루기는 일종의 금기다. 이른바 '길티 플레저'다. 시험 전날마다 책상 정리를 해본 자들, 변동될 가능성이 더 없는 확정된 결과를 받아들이기 두려워하는 겁쟁이들만 책 제목을 보고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은행강도 공범들 사이의 입매 느슨한 웃음을 떠올린다면, 맞다.
이 책은 이미 '미뤄버린' 이들을 위한 변명서다. 유명인들의 역사적 일화, 지역적 지식, 그리고 조금의 유머를 섞은 에세이를 꿰매 기워낸 지식의 누더기다. 법률과 판결문에 등장하는 명징한 조문이나 정의, 딱 떨어지는 요건, 합리적 절차 따위는 철저히 배제됐다. 구불텅한 스파게티 면 같은 글 뭉텅이는 편하디편해서 사랑스럽다. 책 처음부터 끝까지 '미루기의 정의'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미루기는 '단순한 시간 지연' 이상의 의미, 즉 '도약을 위한 준비(내지 왕성한 꾸물거림)' 혹은 '숙성', '간접적 노력' 등으로 표현된다. 숙독할 경우, 미려한 문장으로 일을 미룬 핑계를 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교양서적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그 날들이 사실은 정말 심오한 활동을 하는 때인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되묻게 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사실 위대한 도약의 마지막 잔향일 뿐이고, 위대한 도약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낸 시기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릴케)." 사실 이런 문장을 읽고서 자신에게 관대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릴케가 그랬다는데.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대로 역사적 사건의 뒤편에 개인의 노력, 직관 외에 다른 무언가가 개재됐던 예는 비근하다. 소수의 관행이나 실수, 하찮게 던져둔 잡동사니, 심심풀이로 만든 놀잇감이 전체 사회의 방향 전환을 끌어내기도 한다. 그게 '미루기'였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릴케의 말처럼 위대한 도약의 원동력이 '미루기'에 있는 게 사실이라면 얼마든지 일을 미루겠지만, 경험칙상 그 말이 나나 당신에게 적용될 확률은 낮아 보인다. 생각해보면 미루기를 한 사람이 위대한 도약을 하는 게 아니라, 위인 중 미루는 습관이 있던 이들이 한 줌 있었던 것 아니었겠나. 마지막 순간 납득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이른바 '미룰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게다. 독후감을 쓰는 동안 청소기를 두 번 돌리고, 롤을 세 판 하고, 빨래를 널고 왔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정작 이 문장이 묘비에 적혔다는 정확한 출처를 찾지 못했음
2.
새해 트레바리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법률서적 외에 반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단 한 권도. 이게 인간이 사는 삶인가? 돈을 부어서라도 책을 읽어볼까? 광고를 보고 의식의 흐름대로 결제를 해버렸다. 다녀온 후 후기를 올리기로 한다.**
**당연하게도 트레바리 법인 및 그 임직원 등에게서 일체의 금원을 비롯한 협찬 등을 제공받지 아니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