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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은선 Feb 11. 2020

"직접 키운 양, 핀란드 할머니가 뜬 착한 비니"

얀네 & 안나 미시파르미 공동대표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폿라이트를 받는 구름 위의 패션은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할까? 환상과 욕망을 파는 것이 너무 당연한 패션의 본질로 정의하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달라진 지금의 현실이 반은 어색하고 반은 흥미롭다, 아니 실은 두렵다. 언제부턴가 패션은 트렌드의 리더 자리를 내어주고 '의식주(衣食住)'라는 단어마저도 무색하게 뒷전으로 물러난 모양새다.


'디지털'이라는 화두와 함께 밀려들어온 패스트패션은 환상과 욕망보다는 현실과 실용, 거기에 합리적 가격이 가장 중요한 패션의 지표로 등장하는 새로운 정의를 확립했다. 하지만 지금 패션은 또다시 새로운 라운드를 열고 있다. 현실 실용 가격이 이미 확립된 정의라면 이제 모든 사물은 그 위에 '가치'라는 옷을 덧입히지 않으면 소비자들의 눈길조차 받기 어렵다. 싸면 싼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모든 브랜드와 상품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설득할 만큼의 '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해오던 익숙한 프로세스와 프레임에서 덜어내고 버리고 바꿔 끼느라 분주해야 할 지금, 핀란드의 작은 브랜드 '미시파르미(Myssyfarmi)'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어찌 보면 저렇게 평화로와도 될까 싶게 폭풍 같은 세상 변화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 핀란드의 털모자 브랜드 미시파르미는 시골 농장에서 직접 키운 양털로 동네 할머니들이 짠 작은 액세서리 안에 소박하면서도 풍부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용감하게 발신한다.



얀네와 안나(Janne Rauhansuu& Anna Rauhansuu) 미시파르미 공동대표이자 부부를 만난 것은 지난 2018년 5월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 위크 출장지에서였다.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의 여러 일정 중 헬싱키 시내 한 작은 카페에서 자신들의 신상품 공개를 겸한 팝업 숍을 오픈하는 미시파르미 매장을 나 역시 특별한 기대 없이 방문했었다.


어찌 보면 작디작은 액세서리에 속하는 비니(우리에겐 기껏해야 4 시즌 중 늦가을부터 겨울에 필요한 털모자)를 주요 아이템으로 생산하는 이 브랜드에 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다. 핀란드의 할머니들이 직접 뜨는 손뜨개 작업으로 이뤄지는 브랜드라는 단 한 가지 특성 외에 어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이렇게 자부심 넘치는 컬렉션을 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미시파르미는 즐겁고 매력 넘치는 브랜드다.


내게는 두고두고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한번 헬싱키에 가서 저들의 농장을 방문해보리라 결심했던 곳이기도 하다. '패션'의 정의를 새롭게 해 준다고 할까. 헛된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조분조분 전달하면서 동시에 자신들만의 완벽한 에코시스템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들이 그 어떤 럭셔리 브랜드보다 아름다웠다.



할머니들이 뜨개질하는 모습을 시현해 보여주던 미시파르미 신상품 팝업 매장(2018년 헬싱키 디자인 위크)


“이 자리에 있는 신선하고 풍성한 브런치는 모두 우리가 직접 농장에서 키운 곡물과 야채, 과일로 만든 것입니다. 핀란드 사람들이 매일 아침에 먹는 오트밀을 비롯 모두 전통적인 핀란드 사람들의 식사입니다. 우리 농장에 오면 그런 핀란드 사람들의 정서를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헬싱키 시내에서 170km 떨어진(표준속도로 두 시간 거리) 포이튀에(Pöytyä)에 위치한 우리 농장은 훨씬 더 시골에 위치하고 있지요."


자신들의 신상품을 소개하는 팝업 매장 한편에 준비해놓은 건강 넘치는 브런치 식사도 이들의 콘셉트를 대변하는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얀네 대표가 밥상에 대한 설명에 공을 들이는 것은 이 브랜드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핀란드의 포이튀에(Pöytyä)에 위치한 자신들의 농장에서 오가닉 양을 키우는데서부터 이 브랜드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얀네 대표는 "농장을 가꾸는 일은 나의 삶이고 미시파르미 역시 일이지만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일은 분리돼있지 않고 통합돼 있습니다. 내 삶과 사업이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내가 키운 양의 털을 뽑아 실을 만들고 농장에서 그 실로 동네 할머니들이 뜨개질한 상품을 팝니다. 이번 디자인 위크의 팝업에서도 농장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팝업 매장의 상당 부분은 긴 테이블에서 7~8명의 할머니들이 즐겁게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하는 공간으로 할애했다.



이들은 농장에서 직접 양을 키우고 손뜨개로 상품을 만들며, 동시에 가족과 직원들이 먹을 음식의 식재료도 직접 밭에서 농사를 짓는다. 최근에는 이 식재료들로 푸드 부문까지도 사업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부족한 양털은 옆 마을 농장에서 공급받는다. 양털을 씻는 과정도 가장 오가닉 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손으로 염색하며 환경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한다.


이런 면에서 미시파르미는 가장 헬싱키스러운 브랜드 철학과 함께 평화로운 콘셉트를 지닌, 패션이 아니라 생활과 삶을 이야기하는 브랜드이다. 동시에 이들이 표현하는 모든 것은 '지속 가능함' 그 자체다. 미시파르미의 스토리는 제조의 친환경성뿐 아니라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 관계의 지속가능성까지 포함한다.


자신들이 소유한 핀란드 고유의 양(Finnsheep)은 8마리에 불과하지만 인근의 농장에 1000마리 넘는 양들이 있어서 그 농장과 긴밀히 협력한다. 울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는 양이 자라는 것에서부터 그 양을 누가 키웠는지, 제조의 모든 과정을 누가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다.


협력농장의 소셜 미디어 @rintalantila에서는 미시파르미의 원료로 사용되는 양들이 자라고 관리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방사 공정 중에도 화학 물질이 사용되지 않으며 전체 공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한다. 2019 년 9 월부터 미시파르미는 본사에서 양모를 염색하기 시작했다. 얀네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투명하게 알고 싶어서 우리는 그 일들을 직접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협력농장의 소셜 미디어 @rintalantila에서는 미시파르미의 재료로 사용되는 양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농장도 방문할 수 있다.


"농장이 있는 포이튀에 지역에는 8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데 양은 8000마리가 넘습니다. 사람보다 양이 많은 핀란드는 워낙 인구가 적어서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어 오히려 자연이 더 가깝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 파트너가 생산한 양의 원사보다 더 훌륭한 원사는 없습니다. 매우 부드럽고 가벼우며 밀도가 높은 울입니다." 그는 핀란드 양과 울 소재에 대해 자부심 넘치는 설명을 이어갔다.


얀네는 과거 스위스의 다보스에 살면서 원래 윈드서퍼 프로선수였다. 2001 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세계 10 대 윈드 서핑 선수로 선정됐던 유망주였다. 세계를 여행하며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15 년을 보냈으나 2003 년 부상으로 그는 선수생활을 그만뒀다. 2006 년 스포츠 경력을 끝낸 후 스위스에서 살면서 우연히 뜨개질을 취미로 배웠고 모자 같은 상품을 1000개 넘게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미시파르미 얀네 & 안나 공동대표와 직원들

얀네는 운동선수로 활약하다 부상을 입어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는 얘기를 할 때도 무덤덤했다. 그에게 운동선수로서의 삶과 뜨개질을 하는 삶 사이에 그리 큰 격차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의 표정에서 그 어떤 숨겨진 격정이나 상처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 것조차 무색하게. 우리의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순응과 평안함, 혹은 잘 정돈된 삶의 균형감이라고 할까.


미시 파르미는 2009 년에 설립됐다. "핀란드에서는 과거에 양을 고기로만 판매하고 퀄리티가 좋은 털도 다 버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에게 돈을 주고 털(울)을 확보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차 이를 비즈니스로 만들게 됐지요. 2016년에 아내와 함께 할머니들을 고용해서 이를 패션 브랜드화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니팅을 할 수 있는 할머니들도 많고 농장도 이미 알고 있고.. 사람들이 우리 모자를 좋아하고 우리 스토리를 들으면 관심 있어하는 것을 보고 사업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핀란드의 모든 할머니들은 뜨개질을 한다. 얀네는 퇴직한 할머니들을 활용하면 그분들도 도와드리고 사업도 되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보통은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적적하게 사는데 공동체를 만들면 커피도 같이 마시고 일도 하고 즐겁게 일할수 있겠다 생각했다는 것. 이후 농장부터 판매까지 이어진 미시파르미의 홀 체인, 에코시스템을 완성했다.


미시파르미 팝업 매장 모습(2018년 헬싱키 디자인 위크)

아내인 안나(Anna)는 현재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디자이너로 한때 광고 사업에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지역 여성 농업 협회(Pöytyän Maatalousnaiset)의 4 세대 회원으로 장인 정신의 전통이 삶에 깊이 배어 있으며 Pöytyä에서 시골, 할머니들이 만든 오래된 공예품의 색상에서 늘 영감을 얻는다.


"아내와 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내가 시작했지만 아내가 디자인하고 각자 잘하는 것을 하지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환경을 보호하고 에콜로지컬 한 것을 만들고자 하는 가치관은 둘이 동일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상품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이미 핀란드에 충분한 양이 있고(12만 마리) 모든 할머니들이 뜨개질을 할 수 있으니까요."


현재 미시파르미에는 할머니 20여 명이 일한다. 할머니의 연령대는 정년퇴직 나이인 65세~80세 사이다. 상품은 비니가 가장 메인 아이템으로 목도리, 타이, 베스트, 워모 등을 중심으로 손으로 직접 자연염색을 한다. 리얼 울로 양의 스킨 한 부분으로 모자 방울도 만드는 등 특별한 아이디어 상품도 만든다. 얀네가 계획했듯이 이곳의 할머니들은 같이 모여 뜨개질을 하며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식사도 함께 한다.


미시파르미의 포이튀에 농장에서 손뜨게질을 하는 핀란드 할머니들

특히 이들이 가장 자랑하는 것은 핀란드 오가닉 양의 퀄리티다. 오가닉 양은 오가닉 사료만 먹이고 여름에는 농장 밖 넓은 들판에 나가 자유롭게 놀게 한다. 과도한 양털 채집으로 양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1년에 약 2회로 양털 깎는 횟수에 제한을 둔다. 오히려 양들이 그것을 아주 좋아할 정도로만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방식 덕분에 이 양들은 온순해서 사람에게도 잘 다가온다.


양털을 뽑아 유분기를 씻어내는 처리과정을 ‘그리이즈(grease)'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이즈를 다 뽑아내서 이를 화장품 회사에 파는데 미시파르미는 5%의 유분을 남기고 워시 한다. 이것이 오가닉 양과 일반 양과의 차이점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이들이 자랑하는 핀란드 오가닉 양털의 비결이 아닐까. 방사 공정 중에도 화학 물질이 사용되지 않으며 전체 공정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


미시파르미가 오가닉 한 양만을 주장하자 얼마 전부터 핀란드의 다른 농장들도 오가닉으로 전환하는 흐름이다. 현재 얀네는 농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지고 안나는 그 외 브랜드에 대한 모든 것, 경영, 디자인, 마케팅, 인터내셔널 세일즈 등을 책임진다. 마케팅 책임자이기도 한 안나는 “한국 마켓이 잘 성장하고 있어요. 한국 소비자들이 좋은 것, 건강한 것에 관심이 워낙 많아서 우리를 사랑해주어서 좋아요.”라고 말했다.



현재 판로는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 15개국에 판매하는데 일본에는 에이전트가 있고 한국의 경우 삼성 구호와 현대의 톰그레이하운드에 이어 롯데의 편집매장에서도 판매한다. 한국에 비즈니스를 시작한 2015년 이후 성과가 좋아서 매출이 매년 배로 성장했다. 오프라인은 판매하는 매장이 적어서 아직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온라인은 활성화되고 있다. 웹사이트는 월드와이드로 독일어 영어 핀란드어로 제공되고 한국어 일본어 불어도 제공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느리게 가고 더불어 살며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자연과 사람이 모두 행복하게 공존한다는 것. 이것은 다분히 액티비스트(activist)적인 핀란드 디자이너와 소비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공유되는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다. 핀란드의 패션디자인 역시 이러한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가치는 미시파르미의 정체성과 컬렉션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미시파르미를 떠올리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콜세지를 인용한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소감이 기억난다. 이를 한번 더 응용하자면 "가장 자기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시대, ‘디지털’과 ‘글로벌’ ‘밀레니얼’ 같은 주제로 맨붕에 빠져있는 지금 우리도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면 어떨까.



*참고

이 인터뷰는 패션비즈 재직 당시 2018년 5월 헬싱키 디자인 위크 출장에서 취재해 패션비즈 9월호에 실렸던 특집기사 <슬로 라이프 붐 피니시 패션 뜬다(아래 링크)>의 일부입니다. 당시에 다 못한 얘기를 보강해 이를 재구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https://www.fashionbiz.co.kr/article/view.asp?cate=6&sub_num=92&idx=167451&uidx=17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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