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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Sep 03. 2022

가을의 징조

계절의 기록 #1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가을의 징조는 일찍부터 눈에 띄었다. 햇빛이 두꺼운 구름에 막혀 아주 뜨거운 날은 아니었음에도 한여름이 분명했던 8월 5일, 익을 기회를 놓친 초록색 밤송이가 땅 위로 떨어진 걸 발견했다. 그 뒤로 더 많은 징조들이 나타났다. 연두색 모감주 열매가 나무에 매달린 채 갈색으로 변했다. 보랏빛 맥문동꽃은 진작 만개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 중에 선선한 기운이 감돌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풀벌레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비도 많이 내리고 제대로 된 휴가도 즐기지 못한 여름이었지만 뒤에서 꽉 껴안고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여름에게 간청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매미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파란 하늘에 눈이 시리고 강렬한 햇빛에 온몸이 타들어갈 것 같은 시간으로 딱 이주만 더 머물러주면 안 되나. 이 여름이 지나면 수영장 물이 차갑게 느껴지는 가을이 오고, 낙엽 냄새에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드는 가을이 오고, 자꾸 짧아지는 해에 금방 어둠이 드리우는 가을이 오고, 한해 생명의 순환이 마무리되는 겨울이 코앞인 가을이 오고 말겠지.


계절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부러 마음을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루틴이 만들어진다. 8월 24일,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는데 매미 소리 대신 풀벌레 소리가 시원한 공기와 함께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갑자기 요가가 하고 싶어 매트를 깔았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호흡하고 몸을 풀었다. '너무 좋은 걸!' 늦은 오후에는 산책이 나가고 싶어졌다. 습도가 높아서 여름내 산책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제 산책하기 딱 좋은 시기가 되었다는 걸 몸이 아는구나. 내년에 찔레꽃이 필 때까지는 진하게 풍기는 꽃향기를 맡지 못하겠거니 생각하며 호수를 걷는데 찔레꽃만큼이나 달고 향긋한 향이 바람에 실려 산책로를 떠다녔다.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의 덩굴식물의 꽃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었다. 나무 사이마다 크고 작은 무당거미들이 세네 마리씩 모여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다. 자귀나무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거대한 콩줄기처럼 생긴 열매가 달렸다. 열매의 모양으로 자신이 콩과 식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는 자귀나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밤까지 시끄러웠던 새들의 섬도 다시 고요해졌다. 중요한 일을 마친 쇠백로들이 다음 번식기가 올 때까지 말없이 평화를 만끽하길.


해가 넘어간 하늘을 뒤로하고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끝이 나지도 않는 여름이 벌써부터 그리운 이유가 생각났다. 길고 뜨거운 해와, 짙푸른 나무와 새벽부터 밤까지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자두며 복숭아며 수박이며 과일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여름은 마치 놀이동산 같아서 마음이 들뜨고 신난다. 흥겹고 신나는 마음에는 외로움같이 쓸쓸한 감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덥고 습해 몸이 처지긴 해도 세상이 다 같이 복작이는 느낌이라 나 또한 고독해질 필요가 없다. 기온이 내려가고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면 지난 가을과 겨울의 쌀쌀하고 외롭고 어두운 순간의 잔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 년 내내 들떠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다시 차분하고 조용하고 자주 쓸쓸해지고 가끔은 슬퍼지기도 해야하는 시기임을 알면서도 여름의 끝이 오는 날을 아쉽게 세고 있다.


계절의 변화로 생긴, 여름과 다른 일상에 요가와 산책만 추가되면 좋으련만 당혹스러울 만큼 갑작스럽게 비염이 귀환했다. 인터넷에서 요즘 전국의 많은 비염환자들이 같은 증상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보고 나서 나 혼자만의 애로사항이 아님에 살짝 안도했지만 재채기와 콧물로 정신이 없었다. 26일에는 아침 8시에 창문을 여니 쌀쌀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말매미 소리가 가늘게 울리는데 그나마 자꾸 끊어진다. 한여름의 매미 소리가 폭포수였다면 지금은 수돗물 졸졸 같은 느낌. 수영을 가는데 반팔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반팔도 샌들도 며칠이나 더 착용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오후에 매미 소리가 다시 커졌다. '아직은 여름이구나.' 묘하게 기쁘다.







27 토요일은 아침에 창문을 열고 소파에 누우니 발이 서늘했다. 거실 습도가 무려 54프로까지 떨어졌다. 여름에는 습도가 70프로가 기본이고 며칠 전부터 선선해졌을 때도 63~4였는데 갑자기 54프로라니.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집에서 유난히 콧물을 줄줄 흘렸다. 비염은 심하지만 하늘이 파랗고 공기가 맑고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씨였다. 오전과 저녁   동네 산책을 했다.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걷는데 그늘 아래 샌들을 신은 맨발이 시렸다. 작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놀이터 입구  좋은 곳에 파리를 무려 4마리나 매달고 있는 무당거미의 거미줄을 발견했다. 그중  마리는 최근에 거미줄에 걸린 것인지 금녹색 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루를 주머니에 넣고 두고두고 즐길  있다면 바로 오늘을 선택하겠다고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번도 넘게 말했다. 호수는  아름다웠다. 배롱나무는 여전히 분홍색 꽃을 잔뜩 피우고 쓰름매미가 쓰름쓰름 울고 있는 여름의 풍경과 벌써부터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와 지금은 파란색이지만  보라색으로 영글 좀작살나무 열매들과 아직 파란 이파리 아래 솜털을 달고 있는 목련의 꽃눈이 섞여 이맘때만 느낄  있는 여름반 가을반의 정취가 환상적.


8월 28일 일요일에는 양평에서 풀밭마다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잠자리, 날개를 펴고 2~3미터는 거뜬히 나는 방아깨비, 땅의 일부처럼 보여 발로 밟을까 봐 걱정이 되던 팥중이, 주황색과 검은색의 몸체 위에 금빛 선이 아름다웠던 등검은말벌, 초록색과 갈색의 도토리, 아직 한 번 듣고는 무슨 매미의 울음소리인지 헷갈리는 애매미와 시간을 보냈다. 메밀꽃도 봤다. 한쪽면 전체가 창인 카페에 앉아 맞은 편의 숲과 하늘을 바라보는데 어제 했던 일 년 중 단 하루를 주머니에 넣어 둘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일 년 중 이틀이라고 고치고 어제와 오늘을 같이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이틀을 보내고 맞이한 8월 29일 월요일은 비가 내리고 쌀쌀해서 아침 수영을 갈까 말까 20분 동안 침대에 누워 고민을 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긴팔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30일 화요일은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스탠드를 켜놓고 다시 누워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드는 기분이 달콤했다. 8월의 마지막 날인 수요일에는 오전 나절에는 흐렸지만 오후에 수영을 하고 밖에 나오니 하늘이 예쁘게 개고 있었다. 날이 이렇게 변화무쌍해서야. 이 계절이 나의 심정 같다. 여름방학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과 이제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의욕이 왔다갔다했던 날들. 여름이 가는 걸 붙잡고 싶지만 한편으로 가을을 맞이하며 두근거리는 기분. 오락가락하는 날씨만큼이나 오락가락하던 나도 또 새로운 계절 어딘가에 정착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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