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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영 Jul 28. 2020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레드 립스틱을 생각하다

1,380만 명. 2020년 7월 17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집계된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 수다. 대한민국은 현시점 1만 3천여 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근무시간 내내 보호장구를 사용해야 하는 의료진의 얼굴엔 깊은 자국이 패였고, 항공업 종사자들은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부정적 경제 여파가 큰 상황에서 필수재도 아닌 화장품, 특히 메이크업 제품의 매출이 좋을 리 없다. 외출 시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된 지금, 많은 이에게 메이크업은 ‘해봤자 가려야 하는’ 불필요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메이크업 카테고리 마케터이자 ‘코덕’으로 한 달에 꼭 하나씩은 메이크업 제품을 구매하는 나도 코로나19가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확산하기 시작한 2월 이후엔 립스틱은 전혀 구매하지 않았다. (대신 립밤과 립글로스를 샀지만.) 이를 증명하듯 국내 화장품 공개기업들의 올해 1분기 실적도 좋지 않다. 글로벌 기업도 마찬가지다. 업계 1위인 로레알은 작년 동기간 대비 -4.8%로 1분기 매출 실적을 마감했다.


국내외에서 비대면 구매를 촉진하기 위해 실제 제품을 바르지 않아도 안면인식 기술과 증강현실(AR)을 활용해 화장품을 바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하고, 새로운 ‘언택트’ 판매 방식으로 라이브 커머스를 도입하고 있지만, 코로나19가 위세를 떨치는 한 메이크업 카테고리 매출이 쉽게 반등하진 않을 것이다. 메이크업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 ‘즐거움’이 아니라 ‘귀찮음’에 가까웠던 소비자들에겐, 그리고 하고 싶어도 메이크업을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소비자들에겐 어떤 프로모션도 잘 와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들이 메이크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 전달해야 하는 크리에이티브 메시지는 ‘파격적인 가격’이나 ‘마스크에 잘 묻어나지 않는’ 제품 특성보다 ‘메이크업이 무엇인지, 왜 이 시점에서도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브랜드의 본질적 고민이 아닐까?




메이크업의 시작


종교적 의식을 위해, 혹은 천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위장하기 위해 했던 선사시대의 바디/페이스 페인팅을 제외하고 현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게 행해진 ‘메이크업’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¹ 고대 이집트 시대의 메이크업은 다양한 영화, 광고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이집트인들은 눈 주변을 까맣고, 두껍고, 선명한 라인으로 칠했고, 입술과 볼은 황토와 딱정벌레 등을 식물 기름과 섞어 만든 ‘루즈’로 빨갛게 물들였다. 과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까만 ‘아이라인’을 그린 이유가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라인을 그렸던 물감에 포함된 ‘납’ 성분의 독이 나일강 범람 시 만연했던 눈병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정확히 ‘왜’ 메이크업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 명확한 것은 성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메이크업’은 삶과 밀접한 매일의 의식이었으며, 이를 위한 화학적 지식도 매우 발전했었다는 것이다.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Arkadiy Etumyan / CC BY-SA)


더 높은 신분일수록 정교한 화장품을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와 다르게, 이후 나타난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메이크업의 사회적 가치는 대폭 낮아졌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화장품, 특히 립스틱은 남성을 속이는 부도덕한 것이었고, 성매매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는 이에 한술 더 떠 ‘메이크업을 한 여성은 사탄의 현신’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는데, 메이크업으로 본연의 얼굴을 변화시키는 게 ‘신과 그의 작업’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붉은 안료를 활용해 입술과 볼을 ‘부드럽게’ 물들이거나 흰 분을 덧발라 피부를 더 하얘 보이게 만들어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² 결국, 시대와 문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1900년 초까지 메이크업은 천박한 것과 신분적 우월성 사이를 넘나들며 극단적 취급을 받았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화장하는 여인(Woman at her Toilette)>, 1889.



립스틱, 자유이거나 억압이거나


메이크업에 대한 현대적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였다. 인조 카민(적색 안료로, 인조 카민이 개발되기 전 붉은 색소는 주로 연지벌레에서 추출되었으며 지금도 식용 제품에는 ‘동물성’ 카민을 사용하곤 한다)의 발전과 함께 다량으로 제조된 립스틱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많아졌고, 할리우드 영화의 발전과 영화 속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배우들의 이미지와 함께 대중이 메이크업에 연관 짓던 부정적 낙인도 옅어지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미국의 여성 참정권론자들 중 레드 립스틱을 즐겨 바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직 레드 립스틱은 ‘부도덕한’ 여성들이나 바르는 것이라는 사회의 인식이 채 없어지지 않았던 때, 이들은 그런 인식에 도전하듯 레드 립스틱을 바르고 여성의 참정권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행진했고, 남성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일부러 립스틱을 바르기도 했다. 여성의 메이크업을 적대시하고 규제하는 사회에서 이들에게 립스틱을 바르는 행위는 외모에 대한 주관을 오히려 되찾는 일이었다. 여성 참정권론자들이 레드 립스틱을 바름으로써, 많은 여성에게 립스틱은 ‘신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성 시대 소위 말하는 ‘모던 걸’들이 먼저 립스틱을 비롯한 다양한 메이크업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성 참정권론자들과 계단에 서있는 트릭시 프리간자, 뉴욕


할리우드 배우 같은 외모를 연출하고 싶었든, 아니면 여성의 몸과 복장, 정치를 제한하는 사회에 저항하고 싶었든, 메이크업에 대한 수요는 화학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크게 증가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완전히 대중화되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에선 오히려 립스틱 사용이 장려되었다. 립스틱은 어려운 전시 상황에서 ‘일상의 평범성’을 환기하는 물건이었고, 참전한 남성들을 대신해 일터로 나가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사회로 나가기 전 바르는 유니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실제로, 미 해병대와 항공사들은 립스틱을 여성 유니폼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주둔한 미군 PX로부터 ‘외제’ 화장품이 흘러들어왔고, ‘직업여성’들이 생겨났다. 5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국 영화 제작편수가 100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규모 촬영소가 설립되며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메이크업으로 ‘붉은 입술, 진한 눈썹, 흰 피부’를 연출했고, 60년대가 되자 당시 태평양 화장품(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이 화장품 방문판매를 시작하며 일반인들도 메이크업을 배우고 소비하게 되었다. ‘사탄’이라고까지 여겨졌던 메이크업 제품은 어느새 현대 여성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물건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 미국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메이크업의 대중화가 여성 몸의 주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까지 고양시킨 것은 아니었다. 화장을 하고 싶지 않은, 혹은 이에 관심이 없는 여성들에게 메이크업이란 ‘올바른 여성’이라면 관심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사회가 주장하는 또 다른 굴레에 불과했다. 60년대 미국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폭풍 속,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 씌워진 과도한 ‘미의 기준’에 반대하며 화장품 또한 억압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화장품 산업이 여성에게 ‘장식적인(Decorative)’ 속성을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Alix Kates Shulman Papers / Rubenstein Rare Book & Manuscript Library, Duke University



락앤롤 스타로의 변신


나는 이렇게 양분화된 메이크업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난 제3의 길을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글램 락의 상징,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다. 데이비드 보위는 1972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라는 앨범과 함께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라는 페르소나를 창조했다. 지기는 외계에서 온 ‘옴니 섹슈얼*’ 락스타이자 지구에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러 온 메신저이다. 70년대 초, 아직 보수적이고 단조로운 전후 분위기가 곳곳에 남아있던 영국에서 빨간 머리를 불길이 솟은 듯 삐죽삐죽 올려 넘기고, 선홍색 아이섀도우를 눈두덩이에 잔뜩 칠하고, 눈썹은 메이크업으로 지워버리고, 딱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와 반짝이는 스팽글이 잔뜩 달린 상의를 입고 플랫폼 하이힐을 신은 데이비드 보위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센세이션(Sensation) 그 자체였다. 재미있는 점은, 보위가 스스로를 외계에서 온 락앤롤 스타라고 정의하며 등장했을 때 실제의 그는 ‘아직’ 락스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위는 대중문화 역사에서 전후무후한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는데 메이크업을 사용했고, 그가 창조한 페르소나는 남성과 여성, 그 어떤 성별로도 정의되길 거부했다. 영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에게 메이크업은 자신이 온전히 ‘선택한락스타라는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 스스로를 다른 이들과 구별 짓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이고 독특한 그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괴짜들(Weirdo)’에게 남들과 달라도 괜찮으며, 다른 게 오히려 더 멋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이비드 보위 <알라딘 세인(Aladdin Sane> 앨범 커버, RCA 레코드


페르소나를 창조하는 도구로 메이크업을 활용한 또 한 명의 아티스트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다. 셔먼은 다양한 얼터 에고(Alter Ego)로 변신한 자기 자신을 촬영해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지 선택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셔먼의 작품을 모아 보면, 이 모든 다른 사람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메이크업을 본인이 선택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도구로 쓴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게, 신디 셔먼은 메이크업으로 가짜 페르소나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아티스트의 아이덴티티를 외모로부터 분리한다. ‘진짜’ 신디 셔먼의 모습은 만들어진 수많은 페르소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셔먼의 작품은 외형을 변형시키는 도구로써 메이크업의 한계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겉모습과 그의 내면 사이엔 언제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메이크업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정도가 두껍든, 얇든, 우리 모두는 세상을 향해 어느 정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이때 메이크업은 훌륭한 가면의 역할을 하며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속되지 않는 개인의 다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겉모습이 우리를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겉모습에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메이크업을 변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혹은 사용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메이크업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거나 숨길 수 있지만,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개개인의 자유이며 늘 둘 중 한 방식으로만 메이크업을 사용하라는 법도 없다. 다만, 메이크업은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개성 ‘다름 ‘다면성 인정하고 찬미하는데 도움이   있다. 사회가 바라보는 ‘나’가 아니라 스스로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표현하든, 다면적인 자아 중 하나의 모습을 꺼내 세상에 대응하는 방어막으로 사용하든, 메이크업을 그 도구로 실험해보면 또 어떤가. 리무버 티슈 한 장이면 화장은 지워질 테고, 영혼의 알맹이는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신디 셔먼, <무제 #479(Untitled #479)>, 1975.



다양성을 찬미하다


누군가를 향한 억압이 아니라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을 축복하는 도구로써의 ‘뷰티’를 가장 잘 표현한 최근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은 메이크업 제품이 아니라 향수 제품이다. 7월 말 출시되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향수 ‘퍼펙트(Perfect)’에 대한 개발 아이디어는 마크 제이콥스 팔목에 있는 레터링 타투(‘Perfect’라고 정직하게, 산세리프 대문자로 적혀있다)에서 파생되었다. 그는 15년 전 ‘지금 이대로의 내가 완벽하다’는 자기 긍정의 의미로 그 타투를 새겼다고 한다. 마크 제이콥스는 새로운 향수 캠페인을 위해 모델 케이트 모스의 딸, 릴라 모스를 제외하고 42명의 모델을 직접 소셜 미디어에서 공개 채용했다. 캠페인 영상 속, 다양한 인종, 성별, 체형의 모델들은 각각 비비드한 색감과 질감의 개성 있는 메이크업을 하거나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채 카메라 앞에 서서 우리 모두는 ‘완벽하다’고 말한다. 마크 제이콥스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얘기하듯, 향수 퍼펙트는 ‘낙천주의, 자기 사랑, 독창성(optimism, self-love and originality)’을 축복하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긍정한다.


마크 제이콥스 향수 '퍼펙트' 광고 영상



파격적인 프로모션이나 새로운 판매 방식으로 어려운 순간을 버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코로나 19를 통해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브랜드는 지금 이 순간 왜 우리가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지, 혹은 메이크업이 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비전을 제시하고 '뷰티'에 대해 즐겁게 꿈꿀 수 있도록 만드는 곳일 것이다. 마크 제이콥스가 향수 퍼펙트에서 보여준 비전과 낙천주의를 메이크업 제품에서도 기대하며,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마스크 없이 레드 립스틱을 바르고 활짝 웃을 수 있는 그 날을 즐겁게 상상해본다.




*옴니섹슈얼(Omnisexual): 성별을 구분짓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

¹Schaffer, Sarah, "Reading Out Lips: The History of Lipstick Regulation in Western Seats of Power (2006 Third Year Paper),": 3.

²위의 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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