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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Sep 18. 2017

2016년 6월의 회상...

눈물 나도록 산다는 것

2016.6.20 (월) 점심시간


선정릉을 바라보면, 공기는 여전히 탁하다. 

우습기도,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내 책상 앞에는 몇가지 나만의 신념 (신념이란 말은 너무 거창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부러움 정도?)들이 걸려 있다.

하나는 Bette Midler 의 노래 가사인 "The rose"

또다른 하나는 알베르 카뮈가 이야기 했다던 " Live to the point of tears"

두개의 신념을 아침마다 주문처럼 읽거나, 외우는 짓은 하지 않지만,

오늘은 "Live to the point of tears - 눈물 나도록 살아라"고 하는 글귀가 내 눈에 걸려, 읽고 또 읽어 본다.

카뮈는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소 분분하다고 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라는 뜻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카뮈의 삶을 잘 모른다. 그저 그의 삶을 그의 문학적 언어들의 집합을 통해 전체를 유추해 볼뿐..

카뮈가 이렇게까지 삶에 진지했을까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삷과 눈물을 내가 감히 짐작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눈물 나도록 살아야 하는 것인지.. 죽도록 살아보니 눈물이 나는 것인지.. 

무엇이 행위의 先後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서와는 상관없이... 

눈물을 흘려 본 자만이 역설적으로 제대로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

삶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

어떤 느낌일까? 

이런 감정과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축복이 아닌가 싶다.

너무도 충분히 가지고 있어, 눈물이 날 필요도 없이 행복만 한 사람과 삶을 위해 눈물을 흘려 본 者

어떤 者의 삶이 진정 축복일까?

어쩌면, 고통과 고난.. 역경이란 의미와 人生이란 의미가 서로 다르지 않나 싶다.

이겨낸 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행복감인가 보다.


요즘 박유천이란 걸출한 한류 스타의 성스캔들로 떠들썩하다.

혹자는 이 사건으로 정치적 이슈를 덮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기사를 보니,  2008년 박유천씨가 한 해외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린 낙서가 화제다.

당시 그는 ‘뷰티플(beautiful)’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세 가지로 ‘대화, 한숨, 화장실’을 꼽고 그림에 변기 2개를 그렸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 그림을 보고 프로이드의 인간의 성격 발단 단계 중 하나 인 항문기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배변 통제 시기에 강한 억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유천이란 인물이 그렇게 모범생스러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 짠하다.. (물론 박유천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난 박유천을 잘 모르고, 그의 팬은 더더욱이 아니지만...

다만, 그의 눈물 날 만큼의 노력이 안타까울뿐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도록 살아 가길 바란다..

Live to the point og tears

(2017년 9월에도 박유천의 기사가 가끔 등장한다. 결혼도 한다고 하고, 잘 지내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다시 한 번 눈물 나도록 삶을 이겨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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