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민 Jun 14. 2019

뜻대로 되는 게 없네요

경단녀 전업맘의 비애


 경단녀 5년 차, 이젠 일을 좀 해야겠다 싶어 백만 년 만에 이력서와 자소서를 수정하여 활성화시키고, 나도 육아 봇이나 밥순이가 아닌 주체적인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피어오를 때쯤, 여기저기 소금을 뿌려줘서 소금밭에 파 묻힐 것 같다.


 유치원에 문의했던 아이의 종일반 전환은 인원수 과포화 상태로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당했고, 설상가상 친정부모님의 반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 손길이 가장 필요할 시기인데 굳이 돈 욕심을 내야겠냐며, 적게 쓰고 더 아껴 쓰며 버텨보라 말씀하셨다. 사실 두 분의 건강이 다 좋지 않은 상태라 애초에 오래 맡길 생각도 없었지만, 종일반 전환 신청이 반려된 이상 부모님께 맡긴다는 것 자체가 우선이 될 수 없던 조건이었다. 한두 시간이면 몰랐겠지만 일은 일대로 꼬여버린 상황이라, 나의 주체적인 삶을 실현시키겠다는 꿈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쩜 이래...
트루먼쇼 아냐?


 심지어 서류전형은 합격하여 면접을 앞두고 있었던 곳은 직전 날 밤, 원장님의 친인척 부음으로 미뤄져서 언제 다시 면접 일정이 잡힐 지도 미지수다. 마치 누가 일하지 말라는 것처럼 모든 게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력감이 몰려오면서 드라마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몰려오는 자괴감을 떨쳐내기가 아직도 힘이 든다.


 이렇게 내 인생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이 아이나 키우다가 늙어빠져 죽겠구나 싶어서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만 났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다시 무기력증에 빠져들 것 같다, 겨우겨우 빠져나왔는데 말이다.


 요즘 보기만 해도 행복한 여진구 군을 봐도 웃음이 나지 않는다. 신경질이 나서 혼자 선지 해장국 한 그릇을 클리어하고 집에 돌아왔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허하다. 아버지께서는 주식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재무제표 분석하는 책이며, 계산법이며 잔뜩 쌓아 주셨는데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전공이었던 영어보다 더 지렁이 글씨 같다. 수포자는 이래서 티가 난다.


그렇다고 5년간 손에 놓았던 영어가 쏙쏙 머리에 입력되는 것도 아니면서.


 작년 수능 영어를 풀면서 면접을 준비했었는데, 솔직히 뭐라 X 씨부려 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등부 정도는 가르쳐야 남편이 퇴근하면 바로 바통 터치하고 늦은 시간대에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식이라면 아이와 그냥 집에서 파닉스나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실력 다 죽었네...
원서 읽고 영어로 보고서 작성하고
영어로 발표까지 했던
예전 그 사람, 도대체 어디 갔나?

 

 그런 사람 이제 없는 것 같다. 경단녀는 이렇게 평생 경단녀가 되어, 있던 경력도 삼엽충이 될 것 같다.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혹 결혼을 앞두거나 출산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싶은 말은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의 커리어만큼은 무조건 지키라는 것이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싶은 나이 때에 돈 때문에 갖고 싶은 것들을 눈 앞에 두고 수백 번 망설이게 되는 상황이 너무 짜증 난다. 하물며 아이 전집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돈 때문에 머뭇거리는 나 자신을 수어 번 마주하게 되면 자괴감이 들면서 괴롭다 못해 속앓이 하다 죽을 판이다. 그 누구를 탓하고 싶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내 능력 부족인 것이다.


 아는 워킹맘들이 자신은 돈 버니까 한 턱 쏘겠다고 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동경의 대상이 될 정도가 되어버렸다. 양가 부모님들께선 육아가 더 가치 있는 일이니 괘념치 말라하시지만 내 속은 속이 아니다. 내 새끼 입히고 싶은 것, 시키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것들이 부지기수로 많은데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요즘 그 사실이 나를 더욱 무너지게 만든다.


 괜히 아이를 보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얽매여 있는 이 느낌이 지독히도 싫다. 그래서 때론 도망치고 싶어 진다. 매일 같은 집안일에, 같은 패턴에, 아이랑 놀이터에 가서 멍하니 서성이고 있으면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육아도 나름 3D 직무이다.


 오늘따라 멜라토닌만으로는 잠이 쉬이 들지 못하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푸념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