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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예리 Jun 04. 2023

취향의 발견

리스본행 야간열차, 언어의 무게, 그리고 삶의 격.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해방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정한 한계, 자기 이름을 발음할 때의 느림과 무거움, 생각에 잠겨 박물관의 한 전시실에서 다른 전시실도 더디게 움직이던 아버지의 발걸음과 같은 느림과 무거움에서의 해방,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만들어진 자화상 - 자화상 안에서 그는 시력이 나쁜 사람들이 그러하듯,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먼지가 쌓인 책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 에서의 해방."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


페이지를 넘길 때 다음 페이지가 기다려지는 책. 그렇지만 아껴 읽고 싶은 책. 곱씹고 싶은 문장이 담백하게 이어지는 책. 밑줄 친 문장만 모아 읽어도 평온해지는 책. 한적하고 예쁜 카페를 찾게 되는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내게 그런 책이다. 


서점을 둘러보다 작가의 신작도 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작가의 신작이라는 홍보 문구에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언어의 무게'. 요즘엔 두 책을 같이 읽고 있다.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 내 세계도 다채로워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비로소 오늘에서야 작가가 궁금해졌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필명이었다. 그의 본명은 '페터 비에리'.


"어라?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원래 철학자라고? 철학자로서 낸 책 중에는 '삶의 격'이 있다고???" 


벌떡 일어나 책꽂이를 살폈다.


맞았다. 웃음이 났다. 취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삶의 격'은 독립하면서 집에서 챙겨온 몇 안 되는 종이책 중 하나다. 아이패드가 생긴 뒤로는 종이책을 잘 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괜히 종이 책으로 읽고 싶었다. 책을 다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할 지점을 제시하는 책이었다. 한 번씩 아무 데나 펼쳐서 읽고 싶은 책이라 가져왔다.


페터 비에리와 파스칼 메르시어 각각의 작품을 좋아한다. 문체, 표현, 가치관, 삶의 태도 등은 잔잔하고 단호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작가가 동일 인물이란 점을 알게 됐다. 본캐와 부캐를 동일 인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그에게는 분명 나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또 나를 알았다. 취향의 발견이라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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