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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Dec 14. 2022

잔상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잊어버릴 거예요

 어릴 때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찰박거리며 발을 굴러 걸으면 느껴지는 질척한 땅의 질감도 좋았고, 흙이 뒤섞이며 나는 축축한 냄새도 좋았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가 무릎께를 적시고 손등을 간질여도 그 느낌마저 좋았더랬다.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이유는 우산을 쓰는 날이어서도 있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꼭 장난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톡톡, 누구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종종 허공에 속삭였다. 누구세요? 하고. 별 것 아닌 소리에도 까르르 웃던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정말 저녁을 먹어야겠다. 일곱 시 반이 넘어갔다. 여덟 시쯤이면 소나기가 쏟아진다던데 창 밖이 아직은 잠잠했다.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가 그대로 있는 책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시간 즈음되면 꼭 오는 연락이 있다. 밥 먹었니? 언니는 내가 아직도 애인 줄 알아. 날씨가 궂은날이면 언니는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날이 구질구질한데 우산은 챙겼는지, 겉옷은 두고 다니는지 얇게 입은 건 아닌지. 그런 언니의 애정 어린 말들을 듣고 있다 보면 언니도 참 유난이다 하는 말이 꼭 튀어나온다. 마음 같지 않게. 언니는 내 투덜대는 말을 듣고 나면 까르르 하고 웃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언니의 햇살 같은 웃음소리가 좋았다. 언니의 웃는 소리는 잔상처럼 남는다. 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다른 곳을 보면 까만 점이 일렁이는 것처럼. 소리가 귓가에서 일렁이는 것이다. 까르르- 까르르 하고 계속해서. 나도 괜히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어 보인 뒤에 전화를 끊는다. 매 번 별다를 것 없는 통화에도 기운을 낸다. 그래, 밥을 먹어야지. 혼자 살면 내가 나를 잘 챙겨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나를 좀먹을 때가 있다.


 내가 나를 좀먹지 않기 위해 이사를 온 첫 주에는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다. 스스로를 구석에 놓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언니와 전화를 하고 나서 밥을 먹고 나면, 그렇게 알아둔 동네 곳곳을 산책한다. 누워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나가기 전엔 날씨를 확인한다. 하루에도 날씨가 몇 번이고 변하니까. 비가 오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우산 표시가 떠 있었다. 강수량 50%. 오십 퍼센트는 너무 애매한 확률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요.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오늘 비가 올지도 모르고 안 올 지도 몰라요. 그래도 30%인 것보다 나은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우산을 집었다. 집 앞에서 비가 쏟아질 경우에 다시 집으로 올라오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나가기 싫어질 것 같으니까.

 비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으면 명동 거리를 걷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전까지는 높은 확률로 비를 맞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칠칠치 못하게 구는 내가 좋았다. 누군가에게 꼭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좋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친절과 애정을 베풀고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꼭 나와 같은 결함이 하나쯤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건, 너무 늦은 날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날은 날씨를 보지 않은 채 나갔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날씨를 뒤로 한 채. 오랜만에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다양한 표정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비틀거렸던 것 같다. 목적 없는 발걸음이라는 게 종종 그렇다. 비틀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으니까 나아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걸려서. 한참을 비틀거리던 중에 어, 비 온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흩어져 각각 길거리에 즐비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으로 들어가기 싫은 사람들은 지붕 밑에 자리를 잡고 서서 하늘을 봤다. 얼굴에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청승이구나. 가장 가깝고 좁은 지붕 밑으로 들어갔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 좁은 지붕을 찾아 들어가면, 둘이었던 때는 함께 붙어 있는 게 좋아 키득거렸는데. 혼자 좁은 지붕 아래 겨우 내 몸만 밀어 넣고 있는 것이 훨씬 안온한 것이다. 내리는 비가 멎을 때까지만이라도 이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랐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래도 다음번에는 오래 헤맬 일이 있다면 날씨를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 게 좋으니까. 우산 속이 모르는 지붕 아래보다는 안온하니. 한참 비 내리는 하늘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이다. 언제 그쳐도 좋으니 오늘 안에는 그쳐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갑자기 내리는 비에는 우산을 사기가 망설여진다. 어차피 비는 그치게 되니까. 비가 그치고 나면 우산은 다시 접어두어야 하니까. 펼쳐져 있는 우산은 쓸모 있고, 접힌 우산은 가끔 걸리적거리니까. 그리고 꼭 형태가 달라지면 쓸모가 달라진다는 점이. 편할 대로 하는 사랑 같아서.


 비가 잦아들었다. 슬슬 다시 가봐야겠다. 천천히 지붕을 나섰다. 아직은 톡, 톡 하고 비가 떨어졌지만 이 정도는 맞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곧 그칠 텐데. 세 걸음 즘 갔을 때 저기요, 하고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고개만 돌려 봤다. 대답도 않고.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귀걸이.


그가 건네주는 귀걸이는 분명 내 거였다. 내 건 줄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꾸벅 끄덕였는데, 그도 살짝 목례하고는 돌아서 갔다. 돌아가는 그 사람의 우산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땡땡이. 민트색 땡땡이 우산. 안 어울린다. 목소리는 되게 낮았는데. 귓가에 왕왕 일렁였는데. 파도가 계속해서 치는 바다 동굴 같았는데. 우산이 귀엽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손에는 귀걸이 한쪽을 꼭 쥐고. 비가 그치고도 한참 서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봤다. 별 것도 아닌 순간이 오랫동안 남았다. 손안에 쥔 귀걸이보다 눈앞에서 사라진 민트색 땡땡이 우산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그 사람한테 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찰나의 순간에 사랑에 빠진다거나 한 로맨틱한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고. 평범하게 시작하는 편지를.


안녕하세요, 귀걸이 씨. 이름을 모르니까 당신이 주워 준 귀걸이로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당신이 찾아 주신 귀걸이는 저한테 소중한 거였어요. 하긴, 찾아 주면 다들 감사하다고 소중한 거라고 이야기하겠죠. 어쨌든요. 왜 편지를 쓰냐면.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서요. 귀걸이 씨의 민트색 우산이요. 그리고 목소리 가요. 누군 이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랑에 너무 당해서 지금 당장 첫눈에 반해서 사랑하기는 좀 힘들지만. 이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그러라고 하겠어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도 사랑인가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비 오는 날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씨에 편지를 적을 수는 없으니 그날의 특별한 순간이었던 귀걸이 씨에게 편지를 적는 걸지도요. 제 미지근한 추억을 위해 희생당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생각하니 부디 참아 주세요. 알게 되시더라도. 아직 그 우산을 쓰시나요? 저는 덕분에 잘 지냅니다.

건조한 날들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우산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기억에 오래 남아서요. 우산에 떨어지는 것들이 다 비슷하다지만. 그즈음 저한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몰라요. 나의 유실물을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해야겠네요. 제가 잃어버릴 뻔 한 건 귀걸이가 아니라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마터면 영영 찾지 못할 뻔했어요. 덕분에 요즘은 헤매지 않습니다.


헤매더라도 빠르게 제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오고요. 그날에 잘 돌아가셨나요? 귀걸이 씨의 있을 곳으로요. 나의 귀걸이는 덕분에 제자리로 돌아왔고, 저는 잘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이제는 흐릿하지만. 기억이라는 게 원래 세월의 풍파에 가장 쉽게 지워지고 쏟아지는 거니까. 모래사장에 새겨 놓은 기억들이 하나씩 쓸려 가는 거니까. 가끔 마음이 견딜 수 없이 헤매고 싶은 날에는, 언니의 웃음소리와 그날 민트색 땡땡이 우산을 떠올린다. 나를 슬픔에서 건졌던 것들은, 너무 일상적이거나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이었지 하면서. 일상 속에서 소소한 비일상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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