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AFS with 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Sep 16. 2022

마음을 두고 가지 마세요

히아신스의 꽃말은 마음의 기쁨

 꽃다발을 받았다. 왜 히아신스야? 하고 물었는데 그냥, 꽃말이 참 좋던데. 하고 얼버무렸다.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어 제 머리만 벅벅 긁어 넘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B는 부끄러울 때면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긁어 헝클이는 사람이었다. 연갈색 곱슬머리가 아른거린다.

 B는 나를 만날 때면 작은 꽃 한 송이를 들고 왔다. 대부분은 히아신스였고, 어떤 날은 수국이기도, 해바라기나 장미꽃일 때도 있었다. 꽃을 사느라 늦는 건지 그냥 원체 느지막한 사람인 지는 몰라도 B는 매 약속시간에 조금씩 늦게 도착했다. 내가 보일 즈음에야 팔을 크게 휘저으면서 뛰어왔다. 밋밋한 무채색의 카라티를 즐겨 입는 B의 품에 안겨 있는 꽃 한 송이는 B라는 사람의 색채를 좀 더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매 번 귀찮게 웬 꽃을 사 와? 하고 물으면 B는 하하 웃었다. 그냥, 꽃은 보고만 있어도 좋은 거니까. 내가 꽃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에 그런 줄 몰랐다고 허둥거리다가도 다음 날이면 B는 또 꽃을 사다 줬다. 그가 사다 주는 꽃이 싫지 않았다. 사실 싫지 않은 것은 그뿐만은 아니었다.


 B의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싫지 않았다. 한 번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쓸어 넘겨보고 싶었다. 핏기 없는 피부도 손으로 살짝 더듬어 보고 싶었다. 여름 햇살에 비치면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뺨이 웃을 때 잘 익은 여름 포도처럼 말갛게 물들 때, 콧등에 걸쳐있는 안경이 쓱 내려가면 코를 찡그릴 때, 내 손이랑은 두 마디나 차이나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살짝 감싸줄 때. 그럴 때면 나는 B의 어느 부분에라도 좋으니 강렬하게 닿아보고 싶었다. 깊게 닿지 못하더라도 얕은 곳이라도. 그의 얕은 곳이라도 좋으니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나 애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사랑이라는 것은 좀 더 벅차오르고, 매 순간 감동적인 것. 그런 게 사랑이 아닌가. 상대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 사람이 지나간 길은 꽃향기가 흐르는 것 같은. 하지만 B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사랑이라기에는 무미건조했다. 닿고 싶을 뿐이었다.

 B와 걷다가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아챈 적이 있었다. 내 쪽으로 당겨야 그가 눈앞의 물구덩이를 밟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서였는데, B는 내 손이 닿은 손목부터 얼굴 위쪽까지 서서히 빨갛게 익어갔다. 너도 참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하고 이야기하자 B는 날이 더워 그렇다고 핑계를 댔다. 손을 놓고 더 걸어가는 동안에도 B는 잡혔던 손목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곳에 마치 무언가 남아있기라도 한 듯이. 내가 닿은 것은 순간이고 결국 우리는 이후로 손 한번 잡은 적이 없는데도. 마치 내가 금방 손을 뗀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남아있는 것처럼.


 초록이 우거진 여름에, B가 꽃다발을 들고 온 날에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를 좋아해? 내 말에 B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럼, 좋아하지. 하고 대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B는 내게 "너와 어떤 관계가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했다. 그냥 너랑 나. 좋아하는 걸로 충분하지. 너랑 나 사이는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B를 보니 말할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닌데.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너와 나 사이에 뭐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내 말에 B는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있지. 그리고 히아신스도 있고. 하고 웃었다. 창 밖의 빗소리와 B의 웃음소리가 전부 싫지 않았다. 습하고 축축한 날들 속에 유일하게 싫지 않았던 것 같다고. 이제 와 떠올리는 거지만.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나서야. 사랑이 그리 거창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때 누군가가 닿고 싶은 마음조차도 사랑의 한 면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더라면. B의 웃는 모습에 살짝 일렁이던 마음이나, 작은 보조개에 닿고 싶던 내 손가락, 연갈색 곱슬머리 사이사이를 헝클이고 간질이고 싶던 것들이 전부 사랑이었더라는 것을. 그렇게 작은 걸로도 시작할 수 있던 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마음을 두고 오고 나서야. 아, 우리가 전부 사랑이었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ue :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