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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an 25. 2023

Emmenez-moi

날 데려가 주오

 온도가 달라지면 향이나 맛이 변한다는 건 비단 와인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도 그렇지 아니한가. 현은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도 36.5도라는 체온이 존재하듯이. 아무래도 체온이 떨어지면 우리 신체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오는 것처럼. 온도가 변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니까. 


사람이 제 기능이 안 되는 온도가 몇 도부터인지 알아?


그렇게 물었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지금 37.2도로 지극히 정상인 나도 제 기능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또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그럴 수가 없어 되물었다. 몇 도부터인데.


35도. 오랫동안 차가운 환경에 노출되면 저체온증에 걸리잖아. 35도부터는 뇌, 심장, 폐 같은 중요 기관들의 작동이 천천히 느려진대. 그리고 계속해서 한기를 느끼다가 체온이 34도로 떨어지면 입이 굳어 말이 어눌해지고, 몸을 떨고... 기억력이 깜빡이기 시작하고.


응, 하고 누워서 작게 대답하자 현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34도보다 아래로 떨어지게 되면 떨림이 멎는대.


떨림이 멎는대, 하고 현은 숨을 힉하고 들이쉬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흉내 내는 건 현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다음 순간 그는 파르르 입술을 떨던 것을 멈추었다. 일종의 연출이었겠지.


팔과 다리는 뻣뻣해지고,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해. 그러고는 서서히 몸 전체의 움직임이 굳어 가고, 피부가 푸른빛을 띠면서 서서히 맥박이 느려져. 그러다가 최대 80퍼센트의 확률로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하고...


현은 정말로 무서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겁을 먹었나, 싶었지만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는 귀 끝을 보니 꼭 겁을 먹은 것도 아닌 것 같았고. 빠르고 작은 죽음 같은 거구나. 빠르고 작은 죽음. 그래 종국에는 죽게 되는 거니까. 현은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체온을 잘 유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온도를 잘 유지해야 해. 그러니까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도 우리가 붙어 있는 걸 멈추면 안 된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는 찰싹 와 붙었다. 밖이 슬 춥게 느껴져 방 온도를 높여 놓은 상태였는데, 현은 열이 많은 편이라 금세 더워졌다. 떨어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입이 굳은 것처럼 느껴져서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것보다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한 순간이 있었는데. 현은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려면 체온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체온이 올라가는 것이 마음의 온도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현의 마음이 잔잔하게 나에게 닿아오는 동안, 나는 서서히 식어갔다. 당연한 수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전달된다. 그러니까, 내 온도가 50도, 현의 온도가 45도라면 나에게서 현에게로 서서히. 우리가 같은 온도가 될 때까지.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건 맞춰졌다고 해서 온전히 유지되는 형태로 남지는 않으니까.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을 때 현은 내 팔을 베고 곤히 자고 있었다. 자는 소리가 들렸다. 새근새근 코를 곤다. 현은 금방 잠에 드는 사람이었다. 한번 잠들고 나면 깨는 법이 없다. 옆에서 아무리 부산스럽게 굴어도. 고집스럽게 코를 골고. 언젠가 그런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이제 서서히 식어버리는 것 같아. 

 잠든 얼굴에 대고 속삭일 수밖에 없는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현은 이걸 듣지 못하겠지. 현에게는 꿈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처럼 남겠지. 우리의 이별이 이런 한 마디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 그와 이별을 떠올리면 슬픈 것 같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몰아치는 법이 없다. 내 마음이라는 건. 


어떻게 우리의 온도를 유지하는 게 좋을까. 


그의 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틈 사이사이 가득 차오를 때면 벅차오르던 마음이 이제는 전해지지 않았다. 저릿하기는 했지만. 사랑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사랑이 이런 건가. 평화롭게 하루를 버티기만 하면 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내가 현에게 처음 느꼈던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의 잠든 얼굴만 바라보아도 그저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이걸 유지하고 싶었다. 불타는 마음만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사랑은 보온병에 담을 수가 없다. 식어가는 것은 그대로 변하고. 언젠가는 그도 알게 되고 말겠지. 내가 가진 것이 더 이상 사랑이라 부르기에 너무나도 모자라다는 것을. 

 잔인한 겨울이었다. 현에게도 나에게도. 이제는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생겼고, 함께 자주 다니던 바에 갔다. 평소처럼 나란히 앉아서 한 잔씩 주문했다. 나는 매 번 달라지는 테이블 와인을 한 잔, 현은 럼 베이스의 헤밍웨이(*헤밍웨이 스페셜, 파파 도블레 Papa Double라고도 불림)를 한 잔 시켰고. 현은 언제나 독한 술을 주문해서, 얼음 잔을 따로 달라고 요청했다. 독한 칵테일을 한 모금 먹고, 얼음을 잔에 채운다. 그리고 얼음이 녹을 때까지 달각거리다가, 마침내 얼음이 다 녹고 나면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그렇게 한 잔을 비우는 데 현은 한참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술을 좋아한다는 점은 똑같았지만, 마시는 술과 방식은 또 달랐다. 많은 것이 변해버린 지금에서야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현이 평소처럼 칵테일을 마시고 얼음이 녹아 작아질 때까지 와인잔을 달각거렸다.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센치해?


아냐, 하고 대답하자 현은 작게 웃었다. 


난 원래 독한 술... 좋아해. 이 칵테일도, 설탕이나 시럽 없이도 잘 먹고. 얼음이 녹지 않은 맛을 더 좋아했었어. 그런데, 우리 처음 만났던 날에 너랑 마감 직전의 칵테일 바에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잔머리를 굴렸었어. 얼음이 녹는 시간 동안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랑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변하는 것들도 다 좋아지게 만들더라.


그랬구나 하고 작게 대답했다. 현의 말이 무엇인 지 중요하지 않았다. 현은 나를 위해 기다렸기에, 나는 현을 위해 멈춰야 했다. 지금 하려는 말을. 그래도 말해야만 해서, 운을 뗐다. 현아, 저기.


우리 이제 그만 볼까. 


다음 순간 말을 꺼낸 건 현이었다. 현은 그 좋아하던 발랄한 성대모사나 연출도 하지 않고. 얼음이 그대로인 칵테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서는, 아주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 말은 냉기를 빼앗기고, 서서히 잔 속에 잠기는 얼음처럼 달각거렸다.  











 그의 말은 나에게로 와닿지 못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벽에 닿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우리 둘 다 끝까지 무언가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탄하듯 웃었다. 그도 작게 웃었다. 나는 네가 이런 말을 하러 온 줄 알았어. 나는 괜찮아. 현은 컵을 쥔 채로 아주 서서히 울기 시작했다. 


마음이 식어가는 걸. 나도 어쩔 수 없더라.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사이의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울었다. 울면서 이야기하고, 울면서 들었기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우리는 사랑했고, 사랑을 유지하기에 우리에게는 그것을 감쌀 무언가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체온이나 마음으로도 감싸지 못했기에. 식어가는 것을 그대로 멎어버리도록 두었던 거니까. 

 아주 작은 죽음. 우리의 인생 전부에  비했을 때는… 아주 빠르고 작은 죽음이 지나간 것이었다. 


 나와서 헤어지는 길, 코끝이 빨갛게 물든 현은 이제 갈게. 하고 뒤를 돌아서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으로 들어갔고, 나는 현의 뒤돌아 가는 모습을 한참 봤다. 멎어버린 마음을 가진 채로. 대단히 추운 겨울을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평생 서로의 뒷모습조차 볼 수 없겠지. 바에서 나오고 나서야 차마 다 마시지 못한 내 와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변했을 것이다. 와인은 가장 적절한 때에 나에게 오고, 어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 번 다시 그 활짝 열린 향을 맡을 수 없으니까. 익숙해지고, 또 변한다는 건. 사랑이 와인 같다고 생각했다. 와인이 사랑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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