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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n 07. 2023

적혀있지 않은 것들

헹복해져라

 나도 나를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노을이 뿌옇게 저물어가는 서울의 건물 틈을 바라보면서.


 종종 나와 타인의 관계가 너무 위태롭다는 생각을 했다. 위태롭다는 건 비단 우리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나의 상태가 그러했다. 관계없는 말을 자꾸 늘어놓게 되고, 영양가 없는 대화가 반복되면서 지쳐가는 순간이 길어졌다. 내가 이렇게 지쳤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후련한 게 아니라 울적했다. 여전히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환기가 필요하면 넷플릭스나 왓챠같은 OTT서비스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적당히 짧고 적당히 가벼운 콘텐츠를 틀어 두고 맥주를 마시거나 물을 한 잔 먹었다. 가끔 이불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은 채로 눈만 깜빡였다. 마음에 쏙 들지 않는 한 칸짜리 원룸에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공간 안에 혼자 웅크리고 누운 내가 싫어졌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울면서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다른 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나가야겠다는 생각조차 괴로웠다.


 방 안에서 숨 죽이고 누워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했다. 나의 울적함은 바깥의 봄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마저 아주 오래 걸리게 만들었다. 봄을 마주한 것도 아주 우연히, 아침에 볶아먹은 양배추 냄새를 빼기 위해서 문을 열었다가. 우연히 마주했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따듯했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오늘은 밖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별 거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따라 내리막을 걷다가, 오르막을 걷다가. 길거리에 꽃이 핀 걸 보다가, 그 옆에 붙어있는 작은 포스터에 눈이 갔다.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동네 구석에 있는 작은 미술관이 생각났다. 말이 미술관이지, 동네 유치원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난해한 작품들을 작게 소개하는 공간. 거기를 한 번 가볼까. 천천히 걸었다. 이쪽으로 가는 거였나, 저 쪽이었나. 그제야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정보들이 스쳐 지나가던 의미 없는 하루하루 사이에.

 전시장 입구를 수놓은 봄 꽃이 찬란하다. 앞을 보고 걷던 게 아득한 옛 일 같았다. 손안에 작은 휴대폰 화면만 응시하며 걷던 날들. 사소한 변화는커녕 거대한 변화도 알아채지 못한 지 오래였다. 찬란한 전시장 앞에는 아코디언처럼 생긴 전시회 핸드북이 놓여 있었다. 전시장 문 옆의 작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을 낸다. 찬란한 것 투성이구나.


 이전에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만나는 날들을 사랑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만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날들을.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닿아서, 그래 잘 지내자. 다음에 또 보자. 인생 대충 살자. 하고 숨 넘어가기 직전까지 웃던 걸 좋아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처음 만난 택시기사님과 만담을 주고받으며 새벽 넘어 집에 들어가면 꼬리 치며 반기던 강아지가 있던 곳도. 좋아했다. 어느 순간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많아졌다. 어쩌면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좋다는 말보다 싫다는 말을 자주 해서. 싫다는 말을 솔직한 마음이라고 포장하면서.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풍경도 좋았다. 따듯한 색감의 그림들을 눈으로 찬찬히 좇았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개나리, 봄 볕을 잔뜩 머금은 진달래나 나뭇가지 위의 구름 같은 벚꽃, 계절이 점차 변해감을 알리는 라일락과 아카시아까지.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 같아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가 멈춰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누군가는 봄을 그리고... 결국 흘러가는 것들이 있고. 작은 전시장을 몇 번이고 돌면서 그림 앞을 서성였다. 사실 제일 많이 서성거린 것은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 앞이었다. 창문 앞을 몇 번이고 서성였다. 조각조각 반짝이는 색깔들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좋아서.


 반짝이는 창문 옆쪽, 입구에 놓인 팸플릿이 보였다. 백색의 팸플릿은 '어떤 순간인가요'라는 문구 밑에 커다랗고 텅 빈 직사각형이 뚫려 있었다. 직사각형으로 뻥 뚫려 있는 팸플릿을 그림에 맞추면, 시시각각 직사각형 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작은 액자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감동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갑자기 마음속의 응어리가 주르륵 녹아 내려서 마음 한 구석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B가 전시회에 가면 계절이나 시간과는 상관없이 좋다고 이야기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전시회를 좋아하냐고 물으니 잘 모르지만 싫어하지 않는다던 Y의 말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은 없다. 싫어하는 것이 늘어난 게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스스로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이 된 거였구나. 좀 더 울고, 좀 더 힘들어도 결국에는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돌아가면서 전시회 팸플릿을 한 장 챙겼다. ‘어떤 순간을 살고 있나요?’하는 문구와, 봄날의 풍경들에 대한 설명이 작게 적혀 있었다. 한 단락 정도의 전시회 소개도. 마음에 찬란한 것들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계절의 따듯한 빛을 사랑합니다. 가장 추운 날에도 우리에게는 분명 따듯한 순간이 있고, 어느 계절에나 찬란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비치는 녹음의 그림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의 날들에도 언젠가 따듯하고 좋은 순간이 존재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설명서에 적혀있지 않은 마음을 받았던 날, 나도 나를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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