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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낭 Jun 14. 2022

우리 엄마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예쁜 사람이었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었지"


우리 엄마, 최은순씨는 1956년 음력 1월 19일. 강원도 산골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최씨 고집 못 꺾는다는 말의 산증인으로 그 시절에 서른이 넘을 때 까지 싱글생활을 보내다 큰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시집을 갔다. 그 후 최은순 여사는 슬하에 딸 둘과 아들하나를 두셨는데 이 답없는 자식놈들이 어찌나 속을 썩였는지 인생은 고(苦)라고 느낀 엄마는 불교에 귀의하고 마음을 수양하지만 결국 대장암을 얻어 쉰 여덟이라는 청춘에 고운 눈을 감았다.



제 3자의 눈으로 본 최은순의 인생을 단 몇줄로 적는다면 방금 한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답이 없는 큰 딸의 눈으로 내 어머니의 인생을 이야기 한다면 할 말이 많아진다. 누구의 삶도 글 세줄로 정리하면 희극이 된다고 하더라. 노희경 작가는 「디어마이프렌즈」를 통해, 정확히 말하자면 완이의 입을 통해 '그래도 내 인생을 그렇게 정의한다면 퍽 섭섭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 엄마인생을 저렇게 정의한다면 난 퍽 화가 난다.


  

끝이 없는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주변의 누구하나 괴롭힌적 없는 우리 엄마. 임종 몇 개월전 부터 모르핀으로 인한 섬망까지 얻게 되었다. 섬망은 정신이 뿌얘져서 환각을 보거나 알 수 없는 말을 하게 되는 모르핀의 부작용인데 가끔 불쑥튀어 나오기도 하고 쭉 이어지기도 했다. 모르핀을 줄일 수가 없어 엄마의 섬망은 더 자주 나타나 정신이 또렷한 시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섬망이 오지 않았을 때는 정신이 멀쩡한 바람에 암이 기승을 부리는 것을 다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 엄마 아픈줄도 몰랐으면, 오히려 나를 못알아 볼 때, 이유도 없이 배시시 웃을 때 마음이 놓였다. 


병원 마당에 피었던 벚꽃잎 보다 빗방울을 맞는 일이 잦아 지고, 고요하고 산뜻했던 공기를 매미 울음이 가득 채우고 말았다. 그렇게 봄이가고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엄마는 그날의 날씨만큼 맑았던 표정으로 두 딸에게 당부했다. 


너희 엄마를 아픈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말아라. 아주 예쁜 사람이었지, 이야기가 있던 사람이었지 하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을 하는 엄마가 금방이라도 사라질것 같아서 나는 그런 소리 말라며 겁을 냈었다.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못난 나는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웃는 척 펑펑 울고 있는 두 딸의 손을 잡으며 엄마는 꼭 그래줘야 한다고 다시 한번 웃었다. 아! 얼마나 보고싶은 얼굴인지.


그 말을 남기고 엄마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다며 7월 1일, 쏟아지는 비와 함께 눈을 감았다. 



엄마를 보내고 몇 년. 그녀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늘 다짐했다. 내 살아 생전에 그녀의 이야기를 쓴 글을 남기고야 말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놈에 눈이 엄마라는 말을 생각만 해도 눈물을 쏟아내는 통에 4년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쓰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꿈에서도 엄마가 늘 아픈 사람으로 나오는 통에 우리 엄마는 아직까지 아픈 사람인 것이다. 꿈에서라도 그리운 얼굴 보면 이젠 더 아프지 않느냐는 말, 집어치워야 하는데. 지지리도 못난 딸은 꿈에서도 속을 썩였다. 


꿈 속에서 뿐인가. 끼니를 제 때 챙겨먹는 일이 있나 제대로 된 밥을 챙겨 먹는 일이 있나. 툭 하면 빨리 따라 가고싶다는 생각으로 사는 이 딸은 아직 까지도 엄마의 업보이고 걱정거리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며칠 전 꿈에선 엄마가 호되게 야단을 치더라. 왜 그렇게 혼을 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도 화가나서 엄마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난리를 벌였다. 실망으로 가득 찬 엄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었을 때


아 꿈이었나 싶다가. 나 뭐 잘못했지 하다가. 

아 우리 엄마 안 아픈적은 처음이네 했다. 


그래서 기뻤다. 다행이었다. 펄펄한 기운으로 나를 혼쭐을 내서. 텅 비어 있는 삶을 대충대충 살아 내던 내가, 늘 죽어가는 과정에 서 있는 것처럼 굴어서 착한 우리 엄마 그렇게 화가 났나보다. 당신은 이제 아프지 않고 잘 있다고 안부를 전하려 그렇게 왔나보다.




이제야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쓴다. 살아서는 그렇게 제 잘난맛에 살던 큰딸이  '엄마' 라는 말을 입에만 담아도 목이 막히는 것을 알까. 당신을 생각하며 쓴 글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알까. 당신의 영정사진 앞에선 차마 울지도 못해 건물 구석에서 비를 맞으며 울었던 것을 알까. 


내가 슬퍼서 덩달아 슬프다던 사람. 살아 생전 했던 거짓말은 모두 들통이 났었는데

내가 아직 숨어 운다는 일은 몰랐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엄마를 속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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