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역-이천보-여주보-강천보-비내섬-탄금대, 110km
자전거를 타고 나서 지난 4개월 동안 양평, 속초, 춘천, 장봉도로 남한강길과 미시령, 북한강길과 서해 바닷길을 다녔지만 한 번도 라이딩 후기라는 것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여행에 대한 정보보다는 여행을 통해 얻는 삶의 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가령 어느 고개를 ‘끌바’를 해서 겨우 넘었다는 팩트는 넘치죠. 하지만 자전거 길에 고개가 나오듯 인생에 고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라이더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어제 경의선 양평역을 출발해서 충주 탄금대까지 남한강 자전거 길 종주에 나섰습니다. 조금 일찍 출발했더라면 새재길의 수안보까지 이르렀을 텐데 날이 어두워 남한강길의 종착지인 탄금대까지 가보고 오늘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아쉽지만 새재길은 언젠가 다시 가볼테니까요.
차고 넘치는 정보에 제가 한 술 얹으려는 건 제 삶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단독 라이딩, 자유롭지만 구속이 없어 전일까지도 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퇴근길에 집 앞의 샵에 들러 산 1만5천원 짜리 중국제 라이트가 아니었더라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인공위성도 쏘아 올리는 중국이 우산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오래 전 대만을 방문했을 때 타이뻬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상아공 속에 상아공이 들어 있는 문화재를 보고서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청나라 시대만 하더라도 몇 대를 이어가며 인형 속에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공예품 마트료시카처럼 모기장 구멍만한 미세한 구멍을 통해 겉에서 공을 파서 안으로 또 공을 만들기를 반복했던 놀라운 장인정신은 어디에 팽개친 것일까요? 그런 중국이 전 세계 저가 자전거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죠. 제 자전거는 시마노의 데오레급입니다만 프레임은 메이드 인 차이나입니다.
이 자전거를 타고 지난 8월에 속초 다녀왔다고 하니까 자전거샵 아저씨가 살짝 놀라던데, 프레임과 휠, 기어의 제조사와 제조국이 각각 다른 제 자전거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암튼 이른 아침 경의선을 타고 일산역을 출발하기로 한 계획은 조금 늦게 일어난 데다 지갑을 두고 떠나는 바람에 완전히 늦어져서 열시 반에 이르러 양평역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 주에 사전 답사 차 이포보를 거쳐 여주보까지는 다녀왔기에 심각한 길치인 저도 순조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양평역 – 이포보 - 여주보
이 코스의 최대 고비는 양평을 떠나 얼마 안 되어 나타납니다. 바로 후미개 고개라는 거리가 약 1.5km의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죠. 이 고개를 쉬지 않고 오르면 대략 제 기준으로 15분 정도 걸리더군요. 보통 이 정도면 기어를 최대치로 올리지 않습니다만 체력 안배를 위해 앞 기어를 3단에 놓고 올랐습니다.
양평-이포보-여주보는 각각 15km 되는 구간입니다. 출발이 늦어 이포보 휴게소에는 들리지 않고 여주보 휴게소에서는 화장실만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휴게소에 식당이 없더군요.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포보에는 까페가 여주보에는 편의점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라이더들이 여주보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간단 식사를 하던데 이곳을 놓치면 강천보에 거의 이르러야 식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주보 - 강천보
여주보에서 강천보에 이르는 길은 거리가 짧지만(약 10km) 잠시 남한강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앞만 보고 가다가는 자칫 자동차 길로 빠질 수도 있으니 자전거길 표지판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한강 길은 제대로 가면 자동차가 달리는 국도나 지방도로 빠지지 않기 때문에 혹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길로 접어들면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돌아 나오시면 됩니다.
강천보 휴게소는 한강문화원이랑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곳도 패스하고 문화원을 끼고 우회전하여 강천보를 건넙니다. 강천보를 건너면 왼쪽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급경사라 자전거를 끌고 가도록 바닥에 장애물을 설치해 두었더군요.
강천보 - 비내섬
강천보를 지나 달리다보면 다시 창남이 고개라는 오르막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경사도가 심하진 않지만 비교적 거리가 긴 편이더군요. 나지막한 언덕이 지속된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보스턴 팬웨이 파크의 그린 몬스터럼 떡 버티고 있는 창남이 고개를 보고 질려 고개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보기보다 오르막이 가파르지 않아 점심 먹은 시간이 아까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점심을 잘 먹어 둔 것 같습니다.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충주시에 들어가서 헤매는 바람에 저녁 식사 시간을 또 놓쳤거든요.
이 고개를 내려오면 섬강교가 나타나고 다리를 지나면 원주시 부론면입니다. 다리를 지나 직진 하시면 안 되고 일곱 시 방면으로 좌회전을 하셔야 남한강 길 종주를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정표를 보고 자전거 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만 거대한 트럭 한 대가 제 옆을 스치듯 지나가더군요. 도대체 이런 운전자들은 왜 이런 몹쓸 짓을 하는 걸까요?
사실 이런 짓은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너는 작고, 나는 커’ 이런 생각에서 모든 폭력이 비롯되는 거죠. 그러면 트럭은 기차 앞에서 비행기 아래서 또 작아 질 것입니다.
그 다음 도착지는 비내섬인데 강천보에서 약 30km 가까이 떨어져 있더군요.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고 제가 비내섬 인증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서 민박을 고려했을 정도입니다.
비내섬 – 조정지댐
날이 저물기 시작했지만 힘을 내서 조정지 댐을 향해 갑니다. 날은 어둡고 이날따라 괜찮던 무릎도 아파오고 길은 제대로 가는지 모르겠고 차들은 달려오고 언덕은 나타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야간에 국토 종주하신 분들의 후기를 읽은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봅니다.
조정지 댐에 도착했을 때가 아마도 여섯 시 반쯤. 춥진 않았지만 입동을 이틀 앞 둔 날은 완전히 저물어 있었습니다.
휴게소에서 길 묻는다고 음료 한 캔을 사서 마시고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좌회전해서 조정지 댐을 건너가면 충주댐 방면이고 직진을 해야 탄금대 방면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조정지댐 - 탄금대
원래 국토종주 길은 충주댐 방면으로 나 있는데 지금은 직진 방면으로도 자전거가 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은 길이 완전치 않아 군데군데 길이 끊기더군요. 그래도 계속 앞으로 가야합니다. 조정지 댐에서 탄금대 방면을 가리키는 이정표는 아주 조그마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게 달려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양평을 출발해서 여주보에 이를 때까지는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탄금대 몇 km’를 바닥에 자주 써놓고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이정표조차 달아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격전지로서 신립 장군이 왜군을 맞서 싸우다 전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유적인데도 충주시에 들어서면 탄금대라고 쓴 이정표를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충주는 국토종주 길의 거점으로 수도권을 출발해 낙동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상주와 더불어 지친 라이더들이 쉬어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막상 충주시에 들어서니 초행의 여행자는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정표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자동차 네비게이터가 알려주는 길도 잘 못 찾는 심한 길치인 탓도 있지만 그냥 ‘탄금대’ 이렇게만 써놓아도 될 것을요.
암튼 조정지 댐에서 직진을 해서 중앙탑 길을 지나면 시내인데 저는 이 부근에서 탄금대 방향을 잃어 계속 직진을 하다 야간에 자동차 길로 수안보 방면으로 빠질 뻔했습니다.
다들 후기에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올리는지 몰라도 남들은 척척 잘 만 찾아다니던데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한 십 킬로 정도 헤매다 겨우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다시 자전거 길을 찾아 충주 시내로 진입하는 입구로 들어서자 경찰관들이 음주 단속을 막 시작하려 하더군요.
한 경찰관에게 물었더니 바로 앞의 굴다리 지나면 탄금대라고 하던데 다른 경찰관이 오른 편의 자전거 길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우회전해서 자전거 길로 갔더니 오른 편으로는 새재길이 시작되고 왼편으로 시내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시내에 들어가서는 버스 터미널부터 찾아 갔습니다. 미리 돌아갈 차표를 끊고 숙소를 잡기 위해서였죠. 예정대로 라면 다음 날 일찍 수안보로 갔다가 다시 충주로 돌아와서 오후에 버스를 탈 예정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일찍 충주를 뜨기로 합니다. 다시 안 올 길도 아니고 초보 수준에 양평-충주 110km에 만족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충주 고속 터미널 근처에는 여관도 찜질방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보통은 어딜 가나 터미널 근처에는 사우나나 숙박시설이 있잖아요.
터미널 안의 김밥 집에서 허기를 때우고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 타고 다시 충주 시내를 헤매느니 자전거를 터미널에 두고 택시를 타는 편이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여러 분은 종주 길에 충주 들어가시면 어디서 주무시나요?
전 기사 분께 가까운 찜질방으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곳은 작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찜질방이 크다고 합니다. 저는 ‘조이랜드’라는 큰 곳을 선택.
아프던 왼쪽 무릎은 어제 밤과 오늘 아침에 열탕에 담그고 있었더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낮에 버스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니 수안보로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더군요.
아마 새재 길은 다음에 친구랑 함께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해매긴 했지만 이번 단독 라이딩은 제 라이딩 인생에서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아쉬웠지만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될 것 입니다.
2016.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