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a del espacio
어렸을 때 나의 생활반경은 우리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신반포 한신 4차 아파트 단지가 나의 생활 반경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공간 또한 우리 집에서부터 아파트 옆에 있는 놀이터까지였다.
우리 집 뒤에 반원 초등학교 옆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반원초등학교 동편에서 큰길까지 꽤 넓은 지역이고 청담고등학교가 이전해 온다는 그 자리이다. 거기는 지금 생각해 보면 건축 자재들을 쌓아놓는 야적장이자 그냥 빈 땅이었다. 우리 아파트 옆 라인에 외국인(미국인) 가족이 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그 아이들 자전거가 분홍색이었는데, 브레이크가 없고 페달을 뒤로 밟으면 멈추는 그런 것이었다(싱글 기어). 당시만 해도 그런 자전거는 참 드문 것이었다. 그 집에는 딸이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랑 또래였다. 이름이 메리였나.. 여하튼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몇 번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위에서 말한 공터에서 그 친구가 똥을 쌌는데, 색깔이 내가 누던 진한 갈색의 똥이 아니라, 밝은 갈색이었고 건더기가 달라서 둘이 돌로 막 파헤치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빠가 나를 데리고 종로에 한 번 갔었다. 내 눈높이가 어른 골반 정도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아빠 손을 잡고 위를 많이 봤었던 것 같다. 그 사람 많고 혼잡함은 내 인생에서 거의 처음 경험해 봤던 것 같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종로서적에서 책을 봤고, 우정총국 앞을 지나갔으며, 벅스 버니에 나오는 노란색 병아리를 하얀 티셔츠에 새겨서 사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때에도 공간개념은 거의 비슷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나의 엄마는 우산을 가져다주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은 엄마가 집에 안 계셨던 같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비가 많이 왔다. 나같이 우산이 없는 친구 몇몇 이서 학교 옆 공터에서 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를 피하려고 쭈뼛쭈뼛했는데, 완전히 젖고 나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중에는 흙탕물 웅덩이에 풍덩풍덩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때의 해방감이란..
지금의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는 당시에는 큰 물 웅덩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쯤에는 거기에 가서 올챙이, 물방개, 가재, 소금쟁이 등을 잡았었다. 지금 아이들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거기서 잡아온 생물체들을 집에 있던 큰 화분에 파란색 비닐을 씌운 후 물을 부어서 거기에 키웠었다. 내가 키운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서 집을 떠날 때의 신비감이란..
인터넷을 뒤지다가 당시의 사진을 찾았다. 저수지 자리가 현재의 강남 신세계 백화점 자리이다. 저 너머로 팔래스 호텔이 보인다.
초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가 중학교에 가면서 송파 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그 나이에는 서초구 반포동에서 송파구 잠실까지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성인이 된 이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리인데 그때 나이에만 해도 그 거리와 시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거리였다. 그 친구와는 1년인가 2년 있다가 롯데월드에서 다시 한번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몇 번 교환했는데.. 그 뒤에는 소식이 끊겼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렇게 넓게만 보이던 6차선(혹은 8차선) 길을 하나 건너서 옆단지에 있는 중학교로 통학하게 되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래도 나의 나와바리였던 것 같다. 중학교 때 기억에 남는 공간은, 우리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무슨 대회에서 우리 학교 야구부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중학교 전 학생들이 응원에 동원이 되어서 친구들 몇몇과 함께 동대문으로 가게 되었다. 그전에도 물론 16번 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서울대공원, 서울랜드에 가기도 했지만, 친구들끼리 간 동대문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동대문은 지금의 인도나 동남아의 시장통같이 사람이 많고 붐비고, 또한 위험한 곳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는 방배동에 있는 상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주로 1번, 29번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고등학교 때도 나의 생활반경은 반포나 방배동 일대가 거의 전부였다. 대학교에 가면서 생활반경이 좀 넓어졌는데 학교가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집에 있으면 학교 가기가 싫고 학교에 있으면 집에 오는 게 귀찮았다. 막차시간 파악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나는 되도록 퇴근길 혼잡을 피해 오후 4~5시쯤에 집으로 출발하곤 했다.
대학교 때 매우 인상적인 공간이 하나 있었다. 비 온 다음날 오전에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그때 수업을 쨌는지 아니면 빈시간이 있어서 일부러 나온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종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안개가 끼고 기분이 이상하여 안개 낀 오전의 종묘를 간 적이 있다. 평일 오전시간이라 사람이 없었는데 안개는 자욱하고 비 온 뒤 공기는 신선하고 매우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기회가 된다면 비 온 다음날 아침 종묘 방문을 추천하고 나 또한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사실 대학 이후에 나의 생활반경은 많이 넓어졌다. 유럽여행을 가고 뉴질랜드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군대에서 지방 여기저기를 가게 되고.. 생활반경이 늘어나며 나의 사고의 범위도 늘어난 것 같다. 다만 특정시기에는 특정 지역에 생활반경이 국한되며 다람쥐 챗바퀴 돌듯 그 안에서만 돌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또 멀리 떠날 여행을 꿈꾸게 되고..
지금도 나의 생활반경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집과 직장을 중심으로 반경 10km 이내 정도? 가끔씩 멀리 가기도 하지만 나는 가끔 어릴 때 나의 최초의 생활반경을 생각하곤 한다. 우리 집 아파트와 그 큰길 안쪽까지. 그 너머의 세상엔 무엇이 있는지 잘 몰랐고 그냥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옛날 일본 사람들이 끝없는 태평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유럽 사람들이 대서양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오늘 밤에도 나는 TV를 통해 먼 세상의 소식을 접하고 먼 나라에 여행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상을 본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궁금해진다. 그 너머의 세상엔 뭐가 있을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 또한 가보고 싶다. 지구 반대편과 바닷속 깊은 곳과 하늘 위 높은 우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