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_영화 건축학개론 속 장면 여행 하기
특별한 여행을 꿈꾸다
'영화처럼 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는게 녹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된 지금에야 그저 일상이 거친 느와르 영화같다고 느끼지만, 과거엔 멜로나 판타지를 보며 영화같은 삶을 꿈꿨던 것 같다.
더이상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일상 그 너머를 보게 하는 큰 기쁨이다. 좋은 영화를 볼 때면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장면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가끔씩 꺼내보면서 좋았던 마음을 곱씹어보곤 한다.
좋은 영화를 추억하는 일, 영화의 순간을 조금 더 또렷이 새기고픈 마음으로 영화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프리 프로덕션
꼭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는 가까운 곳이라도 평소라면 관심 없이 다녔을 그 곳을 다시금 바라보는 일. 그게 여행의 시작인 것 같다. 그리고 주저하면 떠날 수 없는 게 여행아닌가?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 멀리 떠나보자'라는 생각에 서둘러 본격 영화 여행의 첫 영화를 정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포스터 속 문구가 좋았던 영화. 동시에 그해 가장 좋았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다.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단계를 프리 프로덕션이라고 부른다. 성공적인 건축학개론 영화 여행을 위해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면서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추리기로 했다.
영화는 35살이 된 승민과 서연이 재회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첫만남이 시작된 20살 때의 이야기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임을 몰랐던 시절, 그들의 어설펐지만 순수했던 과거가 너무 예뻐서 그 추억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20살의승민과 서연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다.
자신이 사는 곳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사진으로 남겨 오라는 과제를 내리는 교수. 승민과 서연은 각자 '정릉'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연히 짝사랑은 시작됐다.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정릉이었다. 20살의 승민과 서연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프로덕션
영화는 정릉에서 많은 부분을 촬영한 듯 싶었다. (다른 지역에서 촬영된 장면도 영화에서는 정릉이라고 표현됐다) 승민의 고향이자 서연과 추억을 쌓기 시작한 곳이 정릉이었기 때문이다. 승민이 살던 낡은 철문 집, 오랜 친구 납뜩이와 만나 이야기하던 곳, 서연과의 우연한 첫 만남이 이뤄진 곳 모두가 정릉이지만 특히 기억에 남던 자리는 바로 이곳이다.
승민과 납뜩이가 주로 대화를 나누던 자리. 재수생인 납뜩이가 공부하던 독서실로 그려진 이곳은 실제로는 종로지역 아동센터로 운영 중이었다. 굽이굽이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야 만날 수 있었던 이곳. 지금은 알록달록한 벽화들이 채워져 영화의 장면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들의 추억만은 고스란히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묘했다.
높고 낮은 건물들을 훤히 바라볼 수 있던 이 자리에서 승민과 납뜩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에서 승민은 주로 서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는데 첫사랑을 하던 승민의 설렘과 영화 속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납뜩이의 유머러스한 대사가 어울려 명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잠든 서연의 입술에 수줍게 입맞춤한 승민의 이야기를 듣고 '키스학개론'을 펼치던 납뜩이. 건축학개론을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할 명장면이었다.
오랜 건물들이 많아 더 추억 속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던 정릉의 어느 자락. 승민과 납뜩이의 추억이 쌓인 동네라고 생각하며 걷다 보니, 그 시절 그들의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건축학개론의 교수는 '건축이란 자신이 사는 곳에 애정을 갖고 그곳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승민에게 정릉은 오랜 고향이었지만, 제주도가 고향인 서연은 대학 진학을 위해 잠시 정릉 지인 댁에 머물고 있었다. 정릉이 낯선 서연과 정릉 토박이 승민은 함께 정릉을 둘러보며 과제를 하기로 했다.
정릉을 걷다 빈 한옥집을 발견하는 승민과 서연. 이곳에서 둘은 많은 추억을 쌓게 되는데, 사실 이곳은 정릉이 아닌 누하동에서 촬영된 장면이다. (미리 촬영지 정보를 찾아 공부했고, 정릉에서 누하동으로 빠르게 옮겨갈 수 있었다.)
건축학개론을 여행하던 날엔 눈이 왔다. 한옥집 아래로 쌓인 눈은 그 운치를 더했다. 그 주변의 모습은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영화를 추억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승민과 서연은 첫 눈이 내리는 날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결국 둘은 만나지 못했지만, 마치 그 날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음은 한없이 설렜다.
정릉과 누하동을 둘러 보다 보니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눈 소식에 발 걸음이 더뎌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영화 여행이라는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처음으로 약소한 준비를 하고, 직접 그 장소로 찾아 떠났던 날.
영화 속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설렘에 설렘을 더하는 행복을 느꼈다.
첫, 영화 여행을 기록하며
보통 건축학개론의 촬영지를 떠올리면 제주도에 있는 '서연의 집'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카페로 운영 중인 서연의 집은 영화를 추억하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흔적을 남겨두었다. 때문에 제주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사랑 받는 관광 코스가 된 곳이기도 하다.
건축학개론을 좋아했던 나 역시도 몇 년 전 이곳을 먼저 찾았다. 관광지로 홍보된 만큼 접근하기도 쉬웠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에 남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기억의 습작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이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틀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_ 기업의 습작 중
내가 생각하는 첫사랑은 그런 것 같다. 먼 훗날이 되어 꼭 서로를 떠올리며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웃음짓는 일 말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슬픈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과거로 기억되는 이유가 이때문이 아닐까 싶다.
35살의 승민과 서연은 그 시절 그들이 서로 좋아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돌이키기에 그 시절은 너무 멀어져 있었다. 승민과 서연은 이제 각자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첫,사랑을 하던 그 때를 떠올리는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기억의 습작처럼 말이다.
승민과 서연이 서로의 사랑이던 시절, 그 발자취를 따라 여행한 영화 건축학개론.
마치 내 추억을 걷는 것처럼 기분 좋았던 첫 영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