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엄마의 첫사랑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하거나 멋을 입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나무'다. 4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의 나무들은 봄에서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열심히 생장하다가 겨울에 그 생장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여김 없이 새로운 봄이 찾아 오면 다시금 생장을 시작한다. 그때 한 줄, 한 줄 생기는 것이 나이테다. 한 해를 차곡차곡 자라온 생장의 기록, 나는 나무가 참 멋있다.
영화 또한 그런 경우가 있다. 세월 탓에 필름의 색깔은 또렷하지 못할지언정 촌스럽기 보다는 고급스러움이 느껴지고 유치하기 보다는 따뜻함이 배어나는.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영화들 중엔 특히 오래된 것들이 많다.
클래식하다
단지 내가 좋아서, 영화 따라 여행을 하고 있다. 그 마음을 먹게 된 데는 이 영화의 몫이 컸다. 참 좋아하던 영화 클래식. 요즘은 쉬이 들을 수 없는 정갈한 대사와 담백한 장면이 많아 지금도 종종 찾아 보곤 하는 영화다.
영화 속 장면이 좋아 그 곳을 가 보고 싶어도 촬영이 끝난 지금에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15년 전 개봉했던 영화 클래식의 많은 장소들은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두 말 할 것 없이 클래식을 따라 이번 여행을 시작했다.
영화 클래식은 지혜(손예진)가 먼지 쌓인 다락에서 엄마 주희(손예진)의 연애 편지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색 바랜 글씨와 누렇게 세월 먹은 종이. 그 안에 엄마 주희의 첫사랑이 있다.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생량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해 줍니다.
그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주희는 여름 방학을 맞아 내려간 아버지의 시골 마을에서 준하를 만났다. 둘은 함께 귀신을 보러 나섰고,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다가 오두막에서 수박을 나눠 먹기도 했다. 칠흙같은 밤엔 반딧불이를 보며 추억은 쌓였고 그렇게 1968년, 엄마 주희의 첫사랑은 시작 됐다.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생량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해 줍니다. 그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지혜가 엄마의 연애 편지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지혜는 그 표현이 자칫 촌스럽다고 느꼈지만 이내 말을 바꾼다. '클래식하다'라고.
생량하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막 찾아온 가을 바람에 실어 내 마음을 당신에게 보낸다는 준하의 편지. 요즘의 연인들이 나누기엔 손 발이 부끄러운 표현일 지 모르겠지만 가을 바람을 보고도 좋아하는 연인과 나누고픈 오랜 마음이 예쁘다.
고향 마을에서 아쉽게 헤어졌던 주희와 준하는 그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수원에서 재회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나던 이 장면은 수원 북중학교와 전주의 성심여고에서 촬영됐다.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찾을 수는 없었지만 준하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의 형태를 찾아 영화 속 공간을 유추할 수 있었다.
클래식, 목포
영화 클래식을 떠올릴 때 이 장면이 빠질 수 없다. 가로등 조명을 깜빡이며 주희를 향해 웃어 보이던 준하. 이곳은 주희의 집 앞 가로등인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클래식의 과거 장면들은 목포에서 촬영된 곳이 많다. 영화 속 이 곳 또한 목포. 현재는 목포 예술 문화센터가 있는 자리다. 영화에서는 이 계단 위에 주희의 집이었던 예쁜 단독 주택이 있었지만 그건 영화를 위한 세트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빈 자리가 괜시리 허전한 것도 사실이지만 주희와 준하가 자주 만나던 집 앞 계단은 그대로라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그 계단 앞에 이 담벼락이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기 때문일까? 주희와 준하의 장면에는 비가 많이 내렸고, 유독 눈물이 많았다. 서로가 기대 울던 담벼락엔 준하의 모습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시선이 주희의 집 쪽을 향하고 있어 더 짠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 클래식의 장면을 보기 위해 찾았던 목포. 목포의 첫 인상은 차분했다. 대부분 건물들의 키가 낮았는데, 그에 반해 간판은 큼직하고 글씨는 반듯한 것이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시는 자꾸 변한다. 불과 작년의 모습과도 많이 달라진 내 고향 서울은 끊임 없이 무언가가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바쁘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추억이 서린 공간이 사라지기도 일수다. 그래서인지 느린 공간이 절실할 때가 있다.
목포 여행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래된 영화의 흔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클래식한 매력이 진득했던 목포. 4,50년은 흐른 주희와 준하의 기억을 되짚어 걸으면서 생애 첫 목포 여행을 마쳤다.
클래식, 서울
영화는 과거 주희와 준하의 첫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현재 지혜와 상민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혜와 상민(조인성)의 모습은 주로 대학가에서 촬영하였는데, 주희/준하의 스토리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시,공간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영화 클래식하면 떠오르는 명장면. 비 내리는 캠퍼스를 함께 뛰는 주희와 상민의 장면은 자전거 탄 풍경의 OST '너에게 난, 나에게 넌'과 함께 지금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은 서울의 연세대학교 캠퍼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지혜와 상민의 이 유명한 씬은 한 캠퍼스에서만 촬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학교는 원광대학교, 연세대학교, 경희대학교.
잠시 비를 피하는 자리였던 원광대학교에서 연세대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까지 뛰어간 셈이다. 당시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고 지혜와 상민이 순간이동 능력자라며 이야기 했다고 한다.(하하)
가만 생각해 보면 '학교'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쌓인 추억의 장소다. 주희와 준하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이 그랬고, 지혜와 상민에게는 대학 시절이 그랬던 것 처럼. 클래식은 기억에 한 켠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학교와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잘 활용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엄마의 첫사랑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괴에테
딸 지혜는 상민과의 사랑을 이뤘지만 엄마 주희는 그렇지 못했다. 왜인지 주희가 담아 놓은 편지엔 눈물 자욱이 많은 것 같다고 상상해 본다.
유명한 시인의 시구를 인용해 차근히 편지를 적어 내렸을그 시절 주희와 준하. 시간이 새로워지는 만큼 그 시절의 행동들은 점점 낯선 과거가 되겠지만, 그래서 클래식은 더 애틋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