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처럼 걸음도 무거울 줄 알았다.
2월의 어느 날, 무작정 걷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떼고 보더라도 '걷고 싶다'는 본능이 문 앞을 나서게 했다.
북한산 자락에 수십 년을 살아왔어도, 매일 일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 풍경들을
당연한 듯 지나쳐 오지는 않았을까. 곱씹으며 두 눈에 나무와 들풀, 표지판 하나하나 담아보려 했다.
아파트 입구를 나와 숨 한번 들이키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산이 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산과 들과 함께 한 삶이었다.
코흘리개 꼬맹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산을 등진 곳으로,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풍겨 나왔다.
교정을 걷다 보면 옆집 강아지마냥 다람쥐가 분주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봄이면 산수유, 진달래, 가을이면 단풍이 빨갛게 드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워나갔다.
어른이 된 지금, 같은 눈으로 보는 풍경은 너무도 당연해 감사한 마음을 잊고 지낸 지 오래다.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다 보면, 매일이 똑같고 미래는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하다. 내색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모두들 알아차리고 있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잿빛 마음, 시야를 가린 안개를 걷어내고 싶다. 작은 의지를 담아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본다. 목표에 다가가면 깨달음이 있을까 기대하며.
고맙게도 내가 있어온 곳, 지금의 내 자리, 앞으로 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이정표들이 반겨준다.
정의공주 묘부터 시작된 왕실 묘역 구간은 가볍게 걷기 좋은 코스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삼삼 오오 모여 느긋하게 걷기 좋은 곳. 주말 아침 햇볕을 맞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기 좋은 곳이다.
왕실 묘역 길을 벗어나면, 소나무 내음 물씬 풍기는 소나무숲길을 걸을 수 있다. 가끔 내키는 날엔 솔밭공원까지 시덕시덕 걸어와 멍하니 앉아있곤 했다. 공원 어귀에 있는 카페에 앉아 어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 자연을 항상 마주할 수 있는 이 호사를, 나는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길까?'
묘역 길에서 이어져오는 소나무숲길은 비교적 긴 거리를 빙 둘러 가므로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함께 걷던 부모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소나무숲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보여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릴 적엔 얄궂은 내 몸을 짊어지고 산을 오를 정도로 기력이 좋은 분들이었는데, 이젠 내가 이끌어야 할 나이가 됐다.
시장할 시간이다. 시래깃국 한 그릇 씩 들며 오후의 여정을 대비한다. 한 숟갈에 몸이 노곤해진다. 늦은 점심시간인데도 와글와글, 시끌벅적하다. 그릇을 나르는 아주머니들의 손이 바쁘다. 한쪽에서는 소리치며 나오지 않은 양식을 기다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반주 한 잔 들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이겠지.
둘레길이라 만만히 보았다가 큰 코 다친다.
흰구름길은 구름을 따라 올라가는 듯, 경사가 꽤 가파르다. 마치 등산로를 방불케 한다. 부모님과의 거리는 이미 한라산과 백두산 마냥 벌어진 지 오래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날이 흐리다. 흐려도 눈 앞 풍경은 맑다. 오히려, 선명하다.
봄을 준비하는지 나무들은 벌거벗은 채 외로이 서있다. 잎사귀를 모두 떨군 채 호젓하게 서있다. 가끔 지나가는 까치 한 마리가 그의 쓸쓸함을 달래준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푸른 잎사귀 돋아날 테니. 숲의 겨울은 길다.
애당초 목표로 잡았던 곳은 정릉의 북한산 입구로, 솔샘길의 마지막 목적지이자 명상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흰 구름의 장난으로 지친 우리에게 선물 같은 길이 펼쳐졌다. 예쁜 공원이 길게 이어진 곳. 그러고 보니 재잘대며 노는 아이들과 지켜보는 부모들이 많았지.
산책하시는 노년의 견주들이 많은 느낌이 든다. 길을 여쭈니 손바닥 보듯 자세하게 알려주신다. 행여나 다른 길로 갈까 멀리서 소리치며 바른 곳을 알려주신다.
옛날 동네다. 옛 모습을 그다지 바꾸지 않았다. 이곳만의 분위기가 있다.
이름도 예쁘다, 솔샘길.
목욕탕이 많았다. 건너편에서 카메라에 담아본다. 안이 궁금해졌다.
꽤 많은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이정표를 따라, 물어 물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터덕터덕 길을 내려온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걷는 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단지 목표만 생각하고 걸었다. 일상을 짓누르던 고민들은 걷는 동안 존재를 감췄다. 눈 앞의 길을 따라 걷는 '지금'만 나에게 있다. 현재를 소중하게 여긴다. 오지도 않은 미래가 현재를 괴롭히고 있진 않은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면 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음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