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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May 26. 2021

“당당하게 죽는 것”과 “구차하게 사는 것”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마음만은 같다.

 어린 시절 이야기다. 나는 10살 즈음에 잠드는 게 무서웠다. 눈을 감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 시절, 나는 죽음을 상상했다.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죽음의 유령은 매일 밤 찾아왔다. 몇 번 눈을 떴다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상상은 더 자라나, 내 방,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나라, 지구, 태양계, 은하수까지 그려질 즈음, 내가 너무나도 작다는 걸 실감한다. “이렇게 작은 게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지.”



 불교의 선승들은 면벽수행을 했다고 들었다. 벽 위에 자기의 번뇌를 마음의 붓으로 적거나 그렸다. 번뇌들을 멀리서 멀리서 볼수록 번뇌는 작아져 새끼손톱보다 작아진다. 그러고는 스윽 손가락으로 지우며 수행은 끝난다고 들었다. “내 삶도 새끼손톱보다 작은 그런 것이겠구나.” 오히려 내 죽음의 번뇌는 더욱 커져갔다.



 “그럼  사는 걸까?” 질문이 넘어가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후세계는  괜찮은, 아니 매우 유혹적인 대답이었다. ‘어차피 끝날 건데 아니라 ‘끝이 아니라고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끌리지 않았다. 참혹한 병마와 죽음의 절망을  년간 상상했는데, 갑자기 해맑게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랍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해버리다니... 또한  대답은 주위 어른들이 질병과 죽음을 걱정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고등학생 즈음에 찾아간 대답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였다. 묘하게 현실적이고 그럴 듯한 답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당히 덜어 낸 느낌이라서 오히려 더 좋았다. 그 때부터였을까. 나는 가족들이 성묘나 제사를 가자고 할 때만은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한다는 게 죽은 사람을 어느 정도 복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무병장수하고 싶었다.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된다. 기억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사관이 있지만, 대충 사회적 기억을 ‘역사’라고 해두자. 중고생 때 역사에 흥미가 있진 않았지만, 사극은 꽤 봤었다. 사극에는 가끔 충신들의 비극적 죽음을 보여준다, 정몽주가 그랬고, 사육신이 그랬다. “살고 싶지 않았을까”와 “무언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니 멋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할 건데, 내게도 그런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동시에 느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죽는 이야기는 여전히 써먹힐 정도로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당시 봤던 영화나 만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주인공의 스승 혹은 윗세대가 소중한 새싹을 지키기 위해 “너희들만은 살아야 한다”며, 결사항전하다가 희생한다. 감정이 메마른 고등학생의 나는 그런 희생의 장면을 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그들의 마음은 비슷했다. 영화나 만화라면 주인공들과 독자들의 기억에, 실제 과거라면 역사와 미래 세대들의 기억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시간이 더 지나 대학생이 되었을 즈음,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사람들을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종종 만나게 됐다. 물론 정몽주 정도의 기개와 인간적 기품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름 대단한 사람이겠구나 했다. 그러나 막상 나서야 할 상황에 그 사람은 나서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말의 무게를 모른 채, 그 사람은 공수표를 남발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 세상에는 소중한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죽는 것’밖에 없는 걸까?”하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러던 와중에,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 아니, 정정하자. 몇 페이지 읽다가 중도하차했으니, 살짝 들춰봤다. 그러나 서문만은 확실하게 읽었다. <사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은 과연 착한 사람의 편인가?” 당시 <중용>, <맹자> 등 유교경전을 성지순례하던 도중의 나는 충격받았다. ‘하늘의 덕을 따르는 왕도정치’를 설파하던 <맹자>와 정반대로, 사마천은 ‘하늘의 선함’을 의심한다. 패악무도의 권세가가 아무 벌도 받지 않은 채 80살을 넘기며 무병장수하는 반면, 의롭고 절개있는 충신 백이와 숙제는 산의 고사리를 뜯어가며 겨우 연명하다가 아무도 모른 채 죽는다. 사마천은 유학을 치세의 근간으로 삼았던 한무제의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늘이란 게 믿을 만한가? 역사를 쓰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사마천이 역사와 하늘에 대한 신성모독을 하는 것에는 개인 사정이 있다. 현대 사회도 일정 정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가문이 있고, 가문에는 가업이 있다. 사마천 가문의 가업은 천문과 역법을 다루는 태사령이었다. 하늘의 별자리와 움직임을 보고, 하늘의 뜻을 기록해 달력을 만든다. 사마천의 가업은 하늘의 시간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모두 담아낸 역사서’. 아들은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따라, “꿈의 역사서”를 쓰고 있었다.



 당시 한무제는 실크로드를 만들고자 하는 야망으로 선대까지 이어진 기존의 화친정책을 철회하고, 유목제국 흉노를 침략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을 따르던 한나라의 장군 이릉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8만(혹은 10만)의 흉노군과 싸우고 있었다. 당연히 이길 리가 없었다. 장수 이릉은 모든 화살을 다 쓸 때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도망쳐 수도로 돌아왔다. 한무제를 포함한 모두가 패전장군 이릉을 탓하고 죽이려 할 때, 태사령 사마천은 그를 두둔했다.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단지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는 사마천에게까지 옮겨붙었다.



 한무제는 자비롭게도 무려 3가지의 선택지를 사마천에게 사사했다. 첫 번째는 50만 전이라는 터무니없는 거금(한 사단 군대의 6개월치 총예산 정도)을 내고 서민으로 내쳐지는 것, 두 번째는 깔끔하게 죽는 사형, 세 번째는 남성의 그 ‘모든 것’을 도려내는 궁형이다. 공무원 월급으로 1번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대개 이 상황이면, “황제에게 간언하다 죽은 충신”을 선택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3번을 선택한다, 아직 사마천의 기억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의 “꿈의 역사서”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절개와 지조를 지킨 충신들의 비극적 죽음을 그 누구보다 많이 만났던 역사가는 반대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해 사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똑같았다. “자신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충신들이 “대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것처럼, 사마천은 “꿈의 역사서”를 “자존심(사회적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후, 목숨을 왔다갔다하는 고비를 겨우 넘겼다(2100여 년 전 한나라 시대에 항생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생사를 넘긴 후에는 여러 감염증과 장이 뒤틀리는 심각한 통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소변을 보고 싶어도, 사방으로 튀어 나가, 그의 방에는 쉰 오줌 냄새가 가득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비겁한 사람”으로 사마천은 사회적 매장을 당한 채, 나무 관짝 같은 집에서 숨을 겨우 쉬며, “꿈의 역사서” <사기>의 한 획을 더해갔다.



 하늘의 가혹한 뜻으로 죽고만 싶었던 사마천은 하늘의 뜻과 천하의 이야기를 써야 했다. “하늘은 과연 착한 사람의 뜻인가?”는 역사 자료를 찬찬히 살피는 ‘역사가 사마천’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도 구차하게 살아야 했던 ‘인간 사마천’이 같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진짜입니까? 당신이 정의를 사랑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럼 나는요? 모든 명예를 잃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몸으로 살아야 하는 나는요?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나는 이불 속에서 땅을 치며 소리치는 사마천을 상상한다(“내 몸이 쓸모없어졌구나”는 실제로 사마천이 한 말이다).




 나는 <사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사실을 짚어내서, 여전히 역사서의 고전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난을 겪으며 깊어진 사마천의 지혜가 그것을 고전에 올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사마천은 나중에 자기와 똑같은 고민을 겪게 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살아남으라고, 살아남아야 대의든 명분이든 이룰 수가 있다고 말하지만, 편지가 도착했을 즈음 친구는 이미 사형대로 향한 뒤였다.



 <사기>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는 어떻게 죽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그 글을 읽자마자 메모했다. 처음에는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이 어떻게 죽는가의 답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소중한 것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도 답이라 본다. 사실 그것은 같은 마음이다. 이상하게도 소중한 것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사람이 좀 그렇게 복잡하다. 어쩌면 역사를 배운다는 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보다는 “사람과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하답니다, 여러분.”을 체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죽어도 지키고자 하는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지켜야 하는 것” 둘 다 같은 마음이겠지만, 나는 “살아남아서 지켜야 하는 것” 쪽으로 생각하고 싶다. 저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기보다 오히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der de vivre!) — 폴 발레리(Paul valé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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