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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Jun 15. 2021

참을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중독성

“조개”와 ‘미용실 토크’

“배우면 즐겁다.” 글쎄. 읽고 배우는 과정은 의외로(?) 즐겁지 않다. “아 그렇구나”라는 깨달음은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인 걸까?”로만 가득 차 있다. 몇 시간 정도 지나고 나면, “아 그게 그런 말이었구나!”라고 깨달은 다음에는 “아니, 이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쓴 거야?!”라며 저자에게 화를 내게 된다. 깨달음 다음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차 오른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가 무슨 뜻인지 모를 지경이다. 전혀 안 즐거운데요… 엄청나게 속은 느낌이라고요. 그렇게 말을 걸고 싶다.



 그렇지만 배우는 것이 즐거운 상황이 있긴 하다. 그건 바로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다(어쩌면 ‘때때로 익히면’의 상황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배우고 읽은 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대방도 내 이야기에 전과 다른 새로운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의 새로운 이야기에 흥이 올라서 또 새로운 반응을 보인다. 이 때의 새로운 반응은 ‘대화하기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내가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던 말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니 활발하고 흥미로운 대화란 사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는 대화”다. 반대로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뻔히 아는 말은 고통이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라든가, 결혼식의 주례사는 듣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다. 무슨 말을 할 지 이미 안다는 건 깔끔한 게 아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독서에 대한 취미를 붙이기도 전에 읽었던 책 중 하나가 김정운의 <노는 만큼 성공한다>였다. 그 책에서 김정운은 ‘인간은 더 나아가기 위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발전했다.’라고 썼다. 처음 그 문장을 읽고 놀라면서도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문장을 처음 읽어서 놀랐고, 한편 그 내용이 참으로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 똑똑하구나…” 그 후에 인류학에 관한 여러 글을 접하면서, 그 내용이 나름의 정설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참으로 몰랐구나…(여전히 이건 새로운 사실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발전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역사 이전의 인류들이 과거, 현재, 미래를 떠올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할 정도면 이미 발전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은 “인류가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단계까지 어떻게 발전했는가?”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인류학은 그 이유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추정한다(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우리가 가진 제도들의 “기원”은 어두운 혼돈 속에 묻혀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추정했던 걸까? 어느 , 고고학자들이  지역에서 조개를 발견했다. 이것 자체는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곳이 해안가에서  km 떨어진 곳이었다는 사실은 문제였다. 어떻게 수 만 년 전 조개가  km 이동할  있던 걸까? 조개에 발이 달린  아닐 테니, 아마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아무리 당시 유랑했다해도  km 이주하는 선사공동체가 있을 리가 없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325km인데, 15 왕복해도 10000km 조금  미친다. 조개를 들고 걸어서 도착했다는 가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봐도 무방하다.




 그럼 조개는 어떻게 이동했던 걸까? 여기서부터는 소설이다. 그러나   들어보시라. 여기는 해안가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숲이다.  숲은 선사 시대의 부족이  대에 걸쳐 살았던 터전이다. 어느  부족의  젊은이가 호기심에 숲을 돌아다니다가 해안가 부근의  외곽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는 신기한 반원 모양의 물건을 발견했다. 참으로 이상했다. 바깥에는 줄무늬가 있고, 속은 파여 있다. “이게 뭐지?” 그는 혹시 누군가가  바깥에 놔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단 대모님께 물어보자.” 그는 신기한 조개를 들고,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은 신기한 물건이 등장하자, 온 난리가 났다. “아니 이게 뭣이여?” 마을은 이 신기한 물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온갖 머리를 쓰며 이야기한다. “이거 밥그릇 아니여?” “에이, 이 사람아. 이렇게 작은 밥그릇을 봤소?” “그럼 뭐시당가?” “음… 그려! 고것은 크기가 도토리만 하니께 대모님께서 거신 목걸이로 쓰면 되겠구만!” “에끼, 뭔 소리를 하는가, 대모님의 목걸이는 신성한 것인디 뭔지도 모르는 것으로 하면 쓰겄는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밤이 되도록 끝나지 않는다. 애초에 정답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사람들은 조개 하나로 이야기하며 기뻐하고 들뜬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대모를 비롯한 지혜로운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는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면, 저주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무언가를 내야 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뭔지도 모르는 것”인데, 그에 걸맞는 보답을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마을은 한 번 더 조개의 교환상대를 정하는 일로 시끄러워진다. 어떤 건 너무 싸고, 다른 건 너무 비싸고 여러 이야기를 거치고 난 뒤 마을 사람들은 “상대방도 정체를 모를 만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숲의 외곽에 놓아둔다. “히히, 저 녀석들도 이걸 보면 깜짝 놀랄 걸…” 그렇게 인류 최초의 커뮤니케이션(교환)이 등장한다.



  선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지금처럼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을 교환, 정확히는 “증여라고 부른다. 공동체는 조개라는 매개체를 교환하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한다. 공동체들은  다음부터 물물교환에 중독된다.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주고받고 싶은 욕망 깨어난다. 학교는 물물교환의 시작을 “산에 사는 사람들은 해산물이 먹고 싶고,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산나물이 먹고 싶기 때문이라 가르친다. 흠… 그렇다면 해산물과 산나물의 용도를 정확히  다음에 교환했다는 말인데, 산에만 살던 사람이 ‘오늘은 뭔가 해산물이 먹고 싶은걸처럼 외식 메뉴를 고르듯이 해산물을 상상할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는 산과 바다를 모두 알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 정반대로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교환이 시작했던  아닐까. 조개를 신기해했던 숲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조개는   번의 교환을 통해 머나먼 내륙지방까지 다다른  아닐까. 교환(커뮤니케이션) 매우 중독적으로 재밌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말이다.




 20세기 러시아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교감적 기능을 파악하여 “교감적 커뮤니케이션”이라 불렀다. 모든 소통행위는 동시에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상징한다. 상당히 있어보이는 말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내용과 별개로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체크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전화를 할 때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들리나요?” “네 잘 들립니다.”라는 말처럼 오직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대화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잘 들어주는 사람”은 항상 인기가 많다. 정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내 말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교감적 커뮤니케이션”의 끝판왕을 나는 미용실에서 처음 경험했다. 바로 ‘미용실 토크’가 그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미용실에서 3시간 넘게 있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20분이면 끝나는 미용실에 무슨 볼 일이 있는 걸까. 미용실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절망이었다. 30분이면 끝난다는 말은 항상 거짓말이다. 10살 남짓의 어린이에게는 ‘오늘 테레비에서 하는 만화영화를 봐야 내일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 파마만 끝나면 모든 게 끝나겠지’라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기다리지만, 파마가 끝났어도 미용실 커뮤니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나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걸 하자는 생각으로 염색을 하러 미용실을 찾았다. 염색 덕분에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1시간 이상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러다 보니, 핸드폰으로도 할 게 떨어졌다. 심심해진 나는 직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너무 재밌다. 지금도 무슨 내용을 나누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무언가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던 것이다. 엄마를 비롯한 미용실 커뮤니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화 소재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교환하는 것 자체가 대화의 재미이자 진정한 목적이다. 마치 숲 속의 사람들이 조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미용실 커뮤니티는 상징(조개)을 끊임없이 교환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교환행위 자체의 재미가 커뮤니케이션을 구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파마를 하러 미용실에 가는 것이 아니다, 정말 파마는 핑계다.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러 가는 것이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이란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한 “조개”에 불과하다. 어떻겠든 “조개”를 구해서 누군가와 교환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어 한다. 아니 그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는 상태를 못 참는다. 내가 하고 있는 브런치란 또 하나의 ‘미용실’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 요즘 독서란 저자의 “조개”를 전달받고 싶다는 내 호기심과 다른 한편에는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한 “조개(글)”을 쓰기 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계속 열어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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