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독서”가 된다.
매년 3월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을 포함한 사람들의 독서에 관한 설문조사들이 나온다. 다들 1인당 독서 시간과 독서율을 가지고, 감소하는 것을 보고 마치 나라의 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독서율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1년 동안 업무용/학업용 이외의 목적으로 책을 1권 이상 읽은 사람들의 비율이 독서율이라 한다. 속으로는 "상당히 적을 것 같은데..." 결과는 무려 52.1 퍼센트였다. 상당히 놀랬다. 대단한데? 책 많이 읽구나...
나는 예전의 글에서도 말했지만, 독서는 취미의 일종이다. 취미를 강요하긴 사실 힘들다. 더군다나 이 취미는 비교적 재미붙이기 힘든 종목이기도 하다. 독서율의 감소 같은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대체 이 시대에 책을 읽겠는가? 옛날이야 활자 매체 말고는 무엇이 없지만, 영상 매체가 등장하고,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스마트폰을 보는 세계에서 굳이 활자를 읽는 수고로움을 누가 하겠는가?
오히려 “독서율”이 마음에 걸린다. 1년 동안 이해 관계를 떠나서 책 1권을 읽은 사람들이 “독서를 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 말이다. 통계에서 기준 잡기는 필수적이기 때문에 트집 잡을 것은 없다. 그런데 “책을 읽었다”는 게 정확히 무엇일까? 독후감을 써야 하는 걸까?, 혹은 책의 내용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 다들 책을 안 읽는 사회를 걱정하는데, 그럼 “독서”의 마지노선이 무엇일까? 이건 생각해볼 만 한 이야기다.
수 년 전, 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었다. 솔직히 말해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 문학적 은유가 가득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 다음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했다. 이런 고민을 지인에게 말했더니, 지인은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고 넘어가. 그리고 다음에 보면 이해될 수도 있어.”라고 알려줬다. 그 이후 우리는 술을 진탕 마셨기에 당연히 다음날 그 조언은 까먹고 그 책도 덮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나는 초등학생의 수업을 보조하는 단기 알바를 했었다. 수업 진도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 마지막날은 다같이 DVD로 영화 <겨울왕국>을 보기로 했다. 당시 나는 <겨울왕국>을 보지 않아 아이들보다 영화를 기대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노래가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20명 남짓의 아이들이 영어 노래를 다같이 따라부르고 있었다. 그런 진풍경이 노래마다 펼쳐졌다. 나는 아이들에 감탄하며 영화를 봤었다.
나는 아이들이 노래 가사 속 모든 영어 단어의 의미를 암기했다고 보진 않는다(그랬다면 <겨울왕국>에 그렇게 몰입하기 힘들다). 그저 아이들은 안나와 엘사를 좋아했다. 안나와 엘사의 노래도 좋아하고, 계속 반복해서 봤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한 아이는 영화를 8번이나 봤다고 했다...) 단어의 의미를 하나하나 외운 다음에 탑처럼 쌓아올리지 않고, 그림처럼 한 번에 본 다음에 부분의 의미는 나중에야 생각해본다. 아이들은 그렇게 습득했다.
“독서”도 “따라 부르기”와 비슷하다고 본다. “독서”는 단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글자를 보고, 소리내서 읽어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책장을 휙휙 넘기는 행동까지 충분히 “독서”라고 부를 수 있다. 그저 끊임없이 외부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차라투스트라>든, <겨울왕국>이든 말이다.
나에게도 아이들의 <겨울왕국>이 있었다. 당시 미드 <하우스>에 빠져 있어서 8시즌 정도의 드라마를 최소 3번 이상 봤다. 처음에는 재미 반, 영어 회화 반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그냥 보게 된다. 만약 미드 정주행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면,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볼 필요가 없다. 이미 내용은 머릿속에 있으니 다시 보는 것은 시간 낭비다. 하지만 3번 이상 보면, 드라마나 영화나 책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기억”이 된다. 계속 반복하다 보면 눈을 감아도 보이고, 마치 그 속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있는 사람처럼, 그 장소가 실제 있는 장소처럼 “나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각인된다. 놀랍게도 “감상의 대상”이 아닌 “나의 기억”이 되었을 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다. 멀리 있어서가 아닌 가까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조선 시대에 “구독(九讀)”이라는 독서법이 있었다. 말 그대로 똑같은 책을 아홉 번 읽는 것이다. 처음 듣고 나서, 그런 게 가능한지 의문스러웠다. 만약 같은 책을 똑같은 집중력으로 꼼꼼히 아홉 번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구독을 더 이상 할 필요없는 위인이다(책에 대해서도 경청하는데, 사람에게는 어떠겠는가).
그러나 구독은 8번 <겨울왕국>을 본 아이와 같다. 조선을 포함한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책을 “읽는다”는 책을 “외운다”와 동의어다. 계속 읽으면서 그 책을 “나의 기억” 속으로 내면화시킨다. 의미는 몰라도 된다, 의미는 “기억”이 된 후에 뒤늦게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의미를 모른 채 외우게 하는 “소독”의 작동원리다. 회초리를 맞으며 의미도 모르는 사자소학을 외웠던 아이들이 불쌍하면서도, 텍스트의 습득원리를 알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의 지혜에 한편 놀랍기도 하다.
반복하는 독서법과 또 다른 독서법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를 보면, 화공인 ‘나’가 그림의 모델인 ‘나미’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나’는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고, 냅다 아무 페이지나 펼친 채 읽어가기 시작한다. ‘나미’는 기이하게 여겨 왜 처음부터 읽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이야기를 신경쓰면 "비인정(非人情)"하게 읽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소설 <풀베개>의 핵심 주제면서도, (뇌피셜이지만) 나쓰메 소세키 스타일의 핵심인 "비인정"은 미묘한 말이다. 소설 속에서는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채, 마치 족자 속 그림처럼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 소개한다. "비인정" 읽기는 서사 속에서 글을 한정짓지 않고, 그 부분 자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방식이다. 파편 읽기로서의 "비인정" 읽기 또한 반복하는 독서법처럼 “독서”를 의미만으로 접근하지 않는 방식이다.
“독서”가 단지 의미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실 “독서”는 설 자리가 없다. 이미 사람들은 활자 매체보다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독서”에는 정보 전달 이상의 체험이 숨어 있다. 영상 매체도 이런 체험이 있지만, “독서”에는 이 체험의 두께가 더 두텁다. “독서”란 의식적인 의미 해석 이상으로 복잡하고 방대한 언어 신호를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쓰는 “말”들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체를 바꾸는 신비로움을 지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