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Est Belle
삼 년을 만나온 남자친구가 길에서 무릎을 꿇었다. 둘 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그는 인적이 드물다 싶을 때 무릎을 꿇었고, 나는 나대로 대로에서 무릎을 꿇은 그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으며 같이 무릎을 꿇었다. 결국 서로 붙잡고 길바닥에 함께 무릎을 꿇은 셈이다. 그러고는 품에서 반지를 꺼내어 보여주며 화려하진 않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결혼하자고 이야기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반지다! 반지다! 반지다!'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스! 를 수십 번 말했다. 서로의 눈에 눈물이 맺혔던 것도 같다. 11월 초겨울 바람이 스산하던 밤 가로등 불빛에 환한 그의 얼굴이 참 예뻤던 것도 같다.
한국은 지금 결혼이나 연애와 관련한 문화가 어떤지 모르겠다. 사람 사는 곳은 항상 변화하는 법이고, 내가 아는 한국의 연애문화는 이십 년 전 고리적 시절이며 그간 업데이트도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아는 미국의 연애/결혼 문화와 한국을 비교하는 것에는 사실 어폐가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과 달리 미국은 약혼이 보통 매우 중요한 통과의례이다. 한국은 보통 연애 초기부터 커플링을 맞춰 끼는 것과는 달리 미국은 결혼을 약속할 때에나 반지를, 그것도 주로 남자가 준비해서 여자에게 프러포즈와 함께 선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지와 함께 '예스'하면, 그 둘은 결혼을 약속한, 약혼상태가 되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약혼했다는 것만으로도 둘이 함께 집을 사거나 건강보험에 이름을 넣을 수도 있다. 법적이나 재정적으로도 '준'결혼 상태로 봐주는 것이다. 법적 효력이 있을 만큼, 미국문화에서 약혼은 나름의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한국과 비슷하게 미국도 보통 30대 초중반에 결혼을 많이들 한다. 그보다 어리면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에 비해 아주 많이 느리다. 마흔네 살에 처음 한 약혼이고, 마흔다섯, 혹은 여섯에 처음 할 결혼이다. 내 나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 마치 야구공 여러 개를 주머니에 담은 것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이랄까. 살아온 날들이 주는 무게감이 마흔넷이라는 나이와 함께 느껴지는 것인가 싶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짧을 수도 있다는 무시 못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지금 이 시점에, 나와 내 약혼자는 삶을 3년 전에는 전혀 몰랐던 타인과 이제는 평생을 함께 보내보겠다는 위험부담이 큰 베팅을 했다.
약혼반지를 받아 들고, '약혼'이라는 상태로 돌입하면서 며칠간은 패닉상태였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진정이 되질 않았고, '누군가와 함께 평생'이라고 조건을 더 붙이면 거기서부터는 심장약을 먹어야 할 상태가 되었다. 공황 비슷한 감정을 느꼈달까. 더 이상은 문의 경첩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빈틈을 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 문의 웨지에 락이 딱 걸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결혼하다를 뜻하는 영단어가 wedlock인가 싶었다. 결혼으로 자물쇠를 거는 것인가, 하는 느낌.
남자친구가 약혼자가 되고 그와 함께 평생을 함께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웠지만, "낯선 이와 평! 생! 을 같이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자물쇠가 놓인 덫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동물처럼 여겨졌다. 아니 이런 감정적으로 어려운 결정을 다들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잘 해내는 것이지? 어쩜 그렇게 다들 대단한가에 새삼 감탄했다.
다행히 패닉은 시간이 지나면서 잦아들었고, 지금은 천천히 둘이 함께 상의하며 결혼식을 할 장소를 고르고, 원하는 결혼식의 스타일을 고르는 중이다. 우리는 시카고가 맞닿아있는 미시간 호숫가에 있는 공원에 위치한 작은 코티지에서 결혼을 하려고 한다. 스몰웨딩이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결국 우리의 웨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가장 작게"가 콘셉트로, 결국 불러야 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야 하는 웨딩이 될 것 같다. 작은 웨딩을 하자며 천천히 하객리스트를 불러보았는데 대강 불렀는데 벌써 60명이다...... 보통 신부 측에서 결혼식 관련 주제를 결정한다지만 내 약혼자는 형제자매가 많고, 그들을 모두 부르고 싶은 눈치다. 반면 나는 가족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밖에 미국에 있지 않고, 비싼 비행기표를 내가며 미국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에 한국의 가족들에게 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뭐, 시간은 아직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내 결혼 1등 장소후보: https://www.herecomestheguide.com/wedding-venues/illinois/promontory-point
결혼식장을 알아보고, 드레스를 알아보고, 드레스와 어울릴 꽃들을 살펴보고, 색깔을 맞추고.... 이러는 과정들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렸을 때 했으면 조금 달랐을까? 한국에서 했더라면 모두 패키지로 나왔으려나? 웨딩드레스를 한국에서는 대여해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곳에서는 직접 사야 한다. 그렇다 보니 비싼 샵에서 맞춰야 하는 몇천 원불 짜리 드레스에서부터 몇백 불이면 맞출 수 있는 작은 샾의 드레스까지 다양하다. 그것도 모두 신부의 발품이다. 그러나 전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발품이므로, 벌써부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이렇게 많은 드레스 디자인과, 패브릭과, 장식이 있을 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부케와 결혼식장 디자인을 맞춰야 하는 줄도 나는 알지 못했고, 그 색조와 신부의 화장색조가 맞아야 하는 줄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맞춰야 하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가. 마흔다섯의 내가 어울릴만한 드레스, 화장, 디자인. 나이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의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고 종종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고는 "어릴 적, 20대 시절에 행복하지 못했으니 지금 너는 그래도 돼."라고 상기시켜 준다.
이십 대의 나는 여러 가지 편지풍파로 인해 젊은이 답지 않은 시기를 살았다. 지금보다 더 지쳐있었고, 삶의 언저리에 간신히 기대어 살았다. 그래도 그런 시절도 지나가더라. 그리고 나는 내가 이래도 행복해도 되나 싶은 시절을 살고 있다.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며, 이렇게 안온해도 되는 걸까, 내가 이렇게 평탄한 길을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삶이 쓰릴 때도 있지만 삶이 달콤할 때도 있다. 나는 믿기지 않게 달콤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아마 이 시절 또한 언젠가 지나겠지. 그러니 지금 현재를 달콤하게 즐기기로 결정한다.
믿기지 않지만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