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의 가장 유명한 책, <축복받은 집>의 영어제목은 Interpreter of Maladies, 번역하자면 질병의 통역사쯤 된다. 아마도 한국어 제목은 가장 처음 소개되어 있는 단편의 제목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선택이지만 한국어로 '질병'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첫 단편 모임집의 제목부터 그가 얼마나 언어와 언어 간, 인간과 인간 간, 세계가 또 다른 세계 간의 번역에 집착해 왔는지 새삼 알게 해 준다. 그녀는 런던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랐다. 그리고 뱅골어를 쓰는 인도계 이민자인 부모를 두었다.. 그녀의 세상은 뱅골어로 시작했지만 곧 바깥 외부 세계를 만나면서 그녀의 뱅골어는 영어로 치환됐어야 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언어들의 향연을 머릿속에서 펼치면서 그녀는 끊임없이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경험하고 좌절하고,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영어로 소설을 여럿 발표한 후 난데없이 그녀는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낸다. 번역도 여러 권 했다. 그렇게 그녀가 이탈리아에서 영원히 살 건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미국으로 와서 다시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고, 번역에 대한 글을 쓴다. 그녀의 가장 최근 책 중 하나인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는 그녀는 이런 여정을 번역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라히리의 새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그녀의 언어에 공명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 또한 그녀의 첫 번째 소설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축복받은 집>이 아닌 "Interpreter of Maladies"로 읽었다. 그러나 이번 책은 "Tranlating Myself and Others"가 아닌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으로 읽는 중이다. 이미 읽는 행위를 통해 나는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덧붙여지고 떨어져 나가는 부스러기 같은 단편적인 의미들의 소실과 획득을 느낀다. 영어로 읽은 Interpreter of Maladies는 내 언어가 아니기에 마치 진공관을 타고 웅웅 거리며 들리는 것 같은 언어들이었다면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은 작가가 직접 하나하나 선택한 언어와의 직접적 교감이 아니기에 한국어로 치환될 때 그 과정에 소실된 작은 의미들의 부재가 느껴진다. 번역가의 힘이 좋아야 하는 이유이고, 언어의 중간지대를 사는 이들이 평생 겪어야 하는 딜레마일 것도 같다.
라히리는 번역을 한 세상을 다른 세상에 접목(graft)하는 일이라는 비유를 했다. 한 세상과 다른 세상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접목- 동일물질이 아닌 서로 성질이 다른 물질들이 만나게 되는 그런 공간을 창출한다는 의미이다. 라히리 본인이 아마도 여러 세상의 접목이 창출한 소산물일 테고, 그녀의 글들이 그런 존재일 테다.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혼란 또한 한국어와 영어, 한국과 미국,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의 충돌과 병합의 결과물이겠지.
번역은 아름다운 행위이다. 친절한 행위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를 타인에게 소개하고 싶은 욕구, 타인의 세계를 내 언어를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물이다. 짜파구리를 람동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번역했다는 영화 <기생충>의 번역가의 이야기처럼, 소개되는 문화에 맞게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 내야 할 때도 있다. 가능한 그 중간지대에서 잃는 의미가 최소화되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중간지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어떠한가?
라히리는 말할 나위 없이 중간지대의 사람이다. 지금도 그녀는 끊임없이 뱅골어와 영어, 이탈리아어를 오간다. 아마도 그녀의 사고 또한 뱅골인들의 가치관과 미국인들의 가치관, 그리고 이탈리아의 가치관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매 순간 가장 상황에 맞는 것을 골라내어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내가 끊임없이 그러는 것처럼.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모두 중간지대 사람들이다. 엄마의 가치관과 아버지의 가치관이 만나 자식에게 전해지며, 자식은 그 둘의 가치관의 충돌과 병합, 변형과 새로운 창출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혀 새로운 중간지대의 사람이 된다. 새로운 학교, 지역, 친구, 직업 등등... 끊임없는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를 통해 우리 속에서는 끝없이 변형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중간지대 사람들이다.
설교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난관에 봉착한다. 자연스레 내 뇌는 한국어로 사고를 진행하지만, 내가 정작 글을 써야 하는 언어는 영어이다. 그리고 영어적 사고과 한국어적 사고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나는 일종의 내 생각의 번역가로서, 내 글에 나타날지도 모를 한국적 사고를 가능한 지우고자 노력한다. 중간지대에서 오래 살다 보니 정체성에도 혼란이 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꿈이다. 최근 나는 꿈을 영어로 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8할의 꿈이 영어이지만 간혹 생경하게 한국말로 대화를 꿈을 꾸기도 한다. 나의 무의식 또한 중간지대 어딘가 즈음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두 세계를 살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두 세계의 언어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어 패치 버전의 나와, 영어 패치가 부착된 나는 살짝 다르기도 한데, 그 다른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것 또한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