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다
브렌다의 첫인상은,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구나!"였다.
갈색의 건강한 피부색은 마치 피부 속에 무언가 빛을 내는 발광체가 있어서 피부세포 사이로 빛이 삐져 나오는 듯 자연스럽게 빛났다. 흑인들의 피부색은 아주 검은 색조에서 아주 밝은 색조까지 다양한데, 브렌다의 피부색은 마치 초콜릿 같았다. 반짝거리며 빛 나는 초콜릿. 그녀의 빨간 립스틱과 함께 하는 날이면 그녀의 초콜릿 피부색은 더욱 건강해 보였다.
활짝 웃는 완벽한 대칭의 미소로 보이는 하얀 이는 또 왜 이렇게 가지런한 건가. 아름다운 눈매와 완벽한 콧대 등, 미스 아메리카에 출전하는 건 저런 사람이어야겠다 생각을 했다. 실제 브렌다는 미스 앨라배마 출신이기도 하다. 덩치가 크지 않은 그였건만 일요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브렌다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학력은 또 어떤가. 저세상 수준이었다. 예일에서 대학을 마치고 하버드에서 로스쿨을, 그리고 브라운에서 의학법률 석사를 마쳤다. 그리고 병으로 그만둘 때까지 시카고의 가장 유명한 로펌 중 한 곳의 파트너로 일했다. 그녀의 인맥 또한 왜 이런 사람이 여기서 나와 이야기하고 있지 싶은 수준이었는데, 한참 트럼프 대통령 관련 소식으로 세상이 시끄럽던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당을 무시한 모든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브렌다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저번에 나온 트럼프 변호사는 예일 다닐 때 우리 동기였는데 학교 다닐 때는 조용한 애여서 그런 애일 줄 몰랐어..." 하는 식으로 브렌다의 대화에는 자연스럽게 언제나 엄청난 이름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녀는 집안마저 어마무시했다. 할아버지가 마틴루터킹 주니어 목사(미국 인권운동의 대부)와 함께 셀마에서 함께 행진했던 침례교회 목사였다. 대대로 목사와 법학자를 배출한, 앨라배마에서는 유명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세 자매 중 막내딸로, 우연히 시카고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 건축과 예술의 도시를 사랑하게 되어 이 도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시카고를 너무도 사랑해서 시카고 역사와 정책 관련 책을 모두 섭렵했을 정도로 그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도시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그녀의 신난 얼굴은 때로 그녀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였다.
세상에서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녀가 난소암에 걸렸다. 병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브렌다는 병실에 있었다. 한 달 전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시카고로 돌아와 재발한 부분의 절제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시카고의 서쪽 지구에 있는 러시 병원의 입원실에서, 시카고 전경이 통째로 보이는 창을 뒤로하고 그녀는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매우 밝았다. 이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때 수술에서 그녀는 그녀의 방광을 절제했고, 그 이후 남은 인생 동안 소변주머니를 찼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나는 수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그녀가 너무도 명랑하게 소변주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탓에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수술 후 해야 하는 간단한 임시조치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3년 동안 그렇게 아름답던 암환자 브렌다는 소변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종종 생각해 본다. 소변주머니를 차고도 꼿꼿이 아름답게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그녀의 의지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까. 암이 나를 정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암을 정의하려고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던 것일까.
그녀의 어머니도 난소암으로 돌아가셨다.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그녀의 언니들은 아무도 암을 겪지 않았지만, 세 자매 중 가장 막내딸인 브렌다만이 어머니의 암 가족력을 물려받았다. 40대 중반에 복부통증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그녀는 난소와 자궁이 온통 혹으로 덮여있었다고 했다. 난소와 자궁 모두 그렇게 크지 않은 기관인데 무려 280여 개의 혹이 있었고, 혹을 떼내는 것이 불가능해서 결국 모두 제거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10여 년 후, 난소암은 난소가 제거된 자리에 남아있는 난소의 세포막에 찾아왔고, 난소가 없음에도 브렌다는 난소암에 걸렸다. 난소를 이미 절제한 탓에 암이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정기검사에서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희귀한 확률이고, 희귀한 암이었지만, 삶은 이상한 찬스를 사용한다. 삶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가장 희귀하고 공격적인 암이라는 커브볼을 던졌다.
브렌다는 자신의 투병기를 자신의 이름을 가진 웹사이트에 썼다. 그리고 글을 친구들에게 이메일 뉴스레터로도 보냈다. 매주 사백여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투병기를 잃고 그녀를 응원했다. 전 세계에 투병기를 헌신적인 열정으로 찾아 읽는 사백여명의 사람을 둔 사람이라니. 그 많은 이들이 그녀의 투병기를 통해 아이러니하게 삶의 용기를 얻는다니. 나는 브렌다를 보며 종종 모순적인 불협화음에 잠깐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렇게 브렌다는 삶을 사랑했다.
그녀의 투병기는 눈물겨웠다. 암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녀의 내장기관을 잠식해 마지막 일 년 반의 투병기간 동안 그녀는 먹지조차 못했다. 그녀와 나눈 마지막 이메일에서 브렌다는 "나는 지금 원톤수프(중국 만두가 들어간 수프로 닭으로 맑은 육수를 낸다)의 국물만 한 숟가락 먹을 수 있어. 음식을 한 입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이야기했다. 음식을 먹는 기본적인 즐거움조차 잃은 채, 일 년 반을 더 살아낸 것이다. 진보한 의학은, 건장한 신체는 때로 암이라는 병마와 가장 악조건까지 싸우게 몰아붙인다고, 그녀의 처절한 마지막 사투를 보며 생각했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건강했던 브렌다는 일 년 반 동안 제대로 된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한 채 링거와 위장으로 곧장 들어가도록 관을 통해 투여되던 영양분과 국물 정도만으로도 더 버텨내었고, 그를 바라보던 우리는 그녀의 정신력과 체력에 경외를 보내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삶이라는 차가운 현실에 몸서리를 쳤다. 아마도 그녀의 투병을 지켜보던 우리 모두, 나는 저렇게까지 아프고 싶지는 않다고, 한 번쯤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 6개월 동안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설립하고, 자신의 장례를 직접 준비했다. 어떤 노래를 부를지, 누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줄지, 사람들이 어떤 색의 옷을 입고 자신의 장례에 와주기를 원하는지 등을 자세히 계획했고, 그녀의 장례는 그녀의 뜻대로, 마치 축제처럼 진행되었다. 이백여명의 사람들이 청록색(Teal)의 스카프나 옷을 입고 참석했고, 그녀의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울고 웃으며 그녀와의 기억을 나누었다. 몇 해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할 때 사용했던 아메리칸 클럽의 볼륨에서 진행된 그녀의 장례는 장엄했고, 즐거웠으며, 슬펐고, 가득했다.
브렌다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이제 2년이 되어간다. 그녀의 언니들은 다시 미시간과 그리스로, 장례 후 자신들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고, 우리도 그녀를 더 이상은 자주 떠올리지 않으며 지낸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열정 -삶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삶에의 열정-이 여전히 브렌다를 내 인생 어딘가 중요한 자리에 위치시킨다.
"차라리 신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비난 섞인 충고에도 욥은 신을 저주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고통을 묵묵히 이겨낸다. 보이지 않는 신, 내 고통 중에 침묵하는 신에게 저주, 아니 그저 원망 한마디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브렌다는 끝까지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런 모습이 누군가가 그녀를 '현대판 욥'이라고 부르게 만든 것이겠지. 삶이 이런 커브볼을 던질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가혹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의 커브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라는 것, 마음껏 좌절하고 절망할 수도, 끝까지 삶을 축제처럼 살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우리의 결정이라는 것을, 브렌다가 가르쳐준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