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Jan 28. 2024

스토커가 있다

현재진행형 스토커 이야기

그에게 또 다른 이메일이 왔다. 그의 이름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리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지독한 미움과 조롱, 분노와 집착이 담겨있는 긴 이메일. 이메일의 끝에는 "아이폰에서 보냄"이라고 영어로 쓰여있다. 이 긴 이메일을 핸드폰으로 썼단 말인가? 


그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작년 여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 틈에 있는 낯선 얼굴에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환영을 건넸다. 목사가 교회에서 하는 일 중 중요한 일은 낯선 공간에서 낯설어할 이들에게 당신은 이곳에서 환영받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아마도 활짝 웃으며 이름을 물었을 테고, 반갑다고 악수를 건넸겠지. 


드문드문 보이던 그는 언제부턴가 정기적으로 예배에 오기 시작했다. 내가 예배에서 메시지를 나누는 날이면 예배 후 다가와 메시지가 좋았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고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내 설교가 좋다고 했다. '좋은 사람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반겼다.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이 교회에 왔었단다. 다만 내가 그를 그때 처음 본 것이었다)

 

여름의 끝무렵 그와 성경공부를 함께하는 청년이 생일을 맞았다. 그의 생일파티를 자신이 주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함께 초대했다. 함께 가려고 했으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나는 생일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따로 점심을 하자고 초대했다. 보통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과는 가볍게 점심이나 커피를 하고는 한다. 사람들에게 공간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다. 친구가 되고, 삶의 일부가 되고, 서로를 더욱 알고 싶어서 행하는 하나의 예식과도 같다. 

그러나 이 사람과는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 이미 위험하다는 신호가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이 사람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내 마음 어딘가에서 감지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집요했다. 이메일로 끈질기게 만나달라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사무실 번호를 알려주니 이제는 화를 냈다. 공적인 문제가 아니면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담스럽게 밀어붙이는 에너지에 이메일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칠 지경이었다. '내가 과대해석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이 사람이 과한 에너지로 밀어붙이는 것인가'를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결국 한번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이 과한 줄다리기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간단히 커피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밥을 먹자고 했고, 일방적으로 차에 태워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을 자신이 운전하는 차로 달려간다. 식사자리에서 처음부터 나는 "남자친구와 산에 가는 걸 좋아해..."라고 이야기해서 넌지시 남자친구가 있음을 알렸다. 짐작대로 그는 당황했고, 그 덕에 점심식사는 빨리 끝날 수 있었다. 그날 그는 다시 이메일을 보내왔다. "아마 너도 지금쯤은 알았겠지. 나는 너에 대해서 로맨틱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너를 목사로 대하겠다"라고.


그때 나는 조금 안심을 했던 것 같다. 아직 이렇게 미친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던 때라, 그렇다면 이 사람과 친구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남자친구와 약혼을 했고, 교회에도 내 약혼사실이 공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고, 나는 몇 주를 축하세례 속에 살았다. 이 사람도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고맙다고 답했다.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이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나는 안심을 하며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그 메시지를 오해했다.약혼자를 따로 둔 채 내가 자신과 따로 만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도대체 '친구로 지내자'는 말의 어디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낀 것일까. 오해하고 싶은 마음은, 작은 단어만으로도 원하는 파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 그는 내 연락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 그와 연락할 마음이 없었던 나는 당연히 연락을 하지 않았고, 한 달 후 다시 화를 내며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내 말을 오해했음을 알았다. 목사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품으면서 목사가 그런 비도덕적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은.


이 모든 일이 있던 내내, 내 마음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불안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메시지 후 12월 마지막 주에 나는 설교를 했고, 그는 내 설교의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은 마음에 들지 않기로 작정을 했거나.


며칠 후 폭발하는 듯한 분노를 담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모욕적이고도 파괴적인 언어와, 괴롭히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넘치고 흘렀다.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했다. 

그 이메일에 나는 "네가 그렇게 느꼈다니 유감이야. 너에게 맞는 교회를 찾기를 바랄게. 축복을 보냅니다"라고 답신했다. 때로 우리는 맞출 수 없는 간극이 있을 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축복으로 서로를 떠나는 것도 좋은 존중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일요일에 그는 교회에 돌아왔다. 나는 다행히 보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그를 보았다고 했다. 그토록 흘러넘치는 분노로 교회와 나를 매도하고 바로 돌아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그가 돌아와서 내가 있는 건물 안을 활보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그는 키가 180센티가 넘는 건장한 남성이고, 이 신체적 차이만으로도 여자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어쩌면 그는, 내 안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잔인해지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3주가 흐른 후, 난데없이 다시 이메일을 받았다.

길고 긴, 분노하고 분노한, 3주가 전혀 흐른 것 같지 않은 같은 농도의 미움으로.


그는 어쨌든 변호사이다. 직업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는 그가 어처구니없는 실수 - 이를테면 실제로 물리력을 행사한다던가와 같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믿고 싶다) 아마도 지금 그의 목표는 이메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이메일을 받은 직후 다행히 나는 매주 받는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고, 내 상담사는 그가 보낸 이메일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녀에게 보여주었고, 그녀는 괴롭히는 이메일이므로 만에 하나 법적절차를 밟아야 할 수도 있음을 내게 주지 시켰다.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온갖 미움을 담은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경계선 성격장애적 특징들이 보인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 격렬한 감정의 변화, 무한한 사랑과 신뢰에서 무한한 미움과 분노로. 극과 극의 온도차이로. 만나달라고 요구하던 때의 그의 메시지들은 이런 미사여구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이토록 자연이 사랑해서 아름답게 만들어놓은 사람이 없고, 이토록 신이 사랑해서 좋은 설교자로 만들어놓았을 수가 없다, 나의 웃음은 보지 못해도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단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자면, 나는 매우 흔한 외모이다.) 내 약혼자도 내게 해주지 않은 찬사들이었다. 그의 언어들은 셰익스피어나 쓸 법한 표현들이라서 약혼자가 그가 보낸 메시지들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뭐 이런 게 잰 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가 있지.."라고 할 정도였다.


이토록 강렬한 그의 감정은 모두 미움으로 치환되어서 이제는 강렬히, 격렬히 나를 증오한다. 

두 번째 이메일을 받은 나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심란했다. 여자들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잘못했나를 고민한다고 한다. 자신들을 응원해주지 않는 세상을 살아내느라 모든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고 한다. 


약혼자와 상담가의 조언으로 나는 Staff Parish Relations Committee(한국말로 하면 교구 관계 위원회)에 사고 리포트를 써냈다. 그간의 상황과 그로부터 받은 마지막 이메일을 첨부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로 이야기하라고 알려왔다. 고마웠다.

혹시라도 위험하다고 느껴질 시에는 바로 경찰이나 경비원에게 알리고, 그 즉시 위원회는 그를 교회에서 떠나도록 조치하겠다고 미리 방침을 세웠다. 정말로, 고마웠다. 그들에게 나는 현재로서는 나는 우선은 그의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협박성 이메일이 계속될 시에는 다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그에게도 앞으로는 여러분과 이야기하라고 알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정말로 그가 물리적 폭력을 내게 행사하지는 않으리라고 여기고 있다.


정말로 그가 스토커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몇 번의 이메일을 내게 보내도 내가 반응하지 않아서 그저 지쳐 떠나기를 바란다. 이번이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다만 마지막이기를 바랄 뿐이다.


목사는 단 위에 서는 직업이라 때로 사람들에게 원하지 않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단 위에 서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겪는 일이리라. 다만 여성으로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은 gender dynamics(성역학)에서 오는 불안이나 공포가 더 큰 것 같다. 교회에 갈 때마다, 무언가 어두운 언저리를 지날 때마다 내 마음은 깜짝 놀라며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핀다. 이 문제가 조용히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