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허리
뭔가 몸으로 하는 걸 배워보고 싶었다. 쭉 운동을 하고 workout, 근육을 만드는 운동들도 몇 년씩 해왔지만, 그런 게 아닌 무언가 artistry가 있는, 몸으로 전문성이 있는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었다. 탱고나 살사 같은 남미 쪽 춤을 배워볼까 생각했지만 우선 높은 힐을 신고 춘다는 점에 안 그래도 비실거리는 내 허리가 아작이 날 것 같아서 망설여졌고, 또 항상 두 명이 춰야 한다는 점에서도 불편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합기도나 태권도 같은 걸 배워볼까 했더니 내가 있는 동네에는 그런 마셜아츠 센터가 없었다. 매번 다른 동네로 가는 건 시간 낭비가 심해 보였다. (물론 마셜아츠에 대한 로망은 항상 있다. 쿵후 중년도 꿈이다)
동네에서 가능한 몸으로 하는 무언가를 검색해보다 보니 발레센터가 나왔다. 시카고에는 조프리 발레단이 있는데 조프리의 디렉터이기도 한 알렉세이 크렘네프(그의 성은 러시안식으로 발음하면 이 발음이 아닐 수도 있겠다)가 디렉터였다. 집에서 걸어서 오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리오타드 같이 달라붙는 옷을 입고 타이즈를 신고 뛰어다니는 무언가를 이 나이에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몇 달을 몇 번을 망설이다 지난여름에 간신히 온갖 용기를 다 붙이고 끌어모아서 등록을 하고 첫 수업에 참여했다.
다행히 수강생은 네 명뿐인 작은 성인기초반이었다. 다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라 함께 헤매느라 매우 다행이었다. 혼자 헤매면 어쩔 뻔했을 것인가...!
한동안 수업에서 돌아오면 두통이 심하게 찾아들어 레슨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을 청해야겠다. 알고 봤더니 발레는 전신근육을 사용해서 쉽게 탈수가 와서(어느 운동인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물을 충분히 마셔야 했는데 나는 몸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두통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또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근육들을 사용하기에 근육이 적응하느라 겪는 적응통이기도 했던 듯하다.
그 이후로 한 시간 레슨 동안 큰 통에 담아 간 물을 모두 마신다. 그런 후에야 더 이상 두통을 겪지 않는다.
발레를 배우고 나서야 발레리나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감사하게 됐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그 가느다란 발목으로 온몸을 지지한 채 발끝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일까. 그 모든 근육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해를 노력해야 했을까. 발레는 노력을 해야 성취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모든 춤들이 그렇겠지. 러닝머신을 뛰거나 역기 같은 기구를 들고 몸의 근육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성취감을 준다. 노력하고 반복해서 어제는 할 수 없었던 피루엣을 오늘은 흉내라도 낼 수 있을 때, 처음에는 깨끔발로 서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래도 안정감 있게 설 수 있을 때,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날 때 느끼는 성취감이 있다.
발레를 배운다고 하자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나는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리는 45도 각도로도 잘 올라가지 않는다. 발레라기보다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여전히 젋다고 생각했는데 발레를 시작하고 나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사십 대는 이십 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했는데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같은 기초반에서 함께 시작한 이십 대들의 근육과 뇌는 동작을 더 잘 기억하고 더 잘 구현해 낸다. 사십 대의 뇌는 간단한 동작의 연결도 기억을 잘하지 못하고, 무릎은 삐걱거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누가 그랬는가. 몸은 그토록 솔직하게 그간 먹어온 나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고오.... 하면서 동작을 하는 나를 보면서, 다른 이십 대 함께 수업을 듣는 아가씨들을 이쁜 딸내미 보듯 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늙었어 늙었어, 하며 혀를 끌끌 찬다.
이십 대에 시작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이십 대의 나는 즐거워했을 것 같다. 사십 대의 나도 매우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그러고는 곧 생각을 고쳐먹는다. 지금이라도 배워서 다행이다. 이토록 힘들지만 재미있는 무언가를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어서 진정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포인트토슈즈를 신고 동작 하나를 제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목표는 달성한 걸로 생각할 것이다.
발레센터에는 아주 꼬맹이들부터 꽤나 전문적으로 발레를 하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다양하다. 그 중 중국에서 온 여자아이 하나는 아예 전문 댄서가 될 요량으로 발레를 배우는 것 같았다. 중국유학생일 텐데, 항상 센터에 있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듯했다. 배를 볼록하게 내밀고 레오타드를 신은채 뛰어다니는 꼬맹이들부터, 아름다운 점프와 선을 쉴새없이 만들어내는 학생들까지, 발레센터는 바쁘고 활기차다. 그리고 물론 선생님들은 전부 러시아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산 지 오래됐을텐데, 러시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인사를 전혀 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서로 몰라도 얼굴이 마주치면 인사하는 문화에서 저렇게 굳은 얼굴로 있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추운 지역에서 와서 그런가...하고 우리끼리 수군거리고는 한다.
근육운동을 오랫동안 해왔기에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 묘하게 체형이 바뀌었다. 어깨가 넓어지고 무언가 선이 길어졌다. 오, 쪼끔 발레리나 라인이 나온다. 마흔넷 발레리나는 오늘도 에구구 내 허리야를 연발하며, 즐겁게 발레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