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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주로가 있는 밤 Sep 12. 2022

월세 살면서 공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공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250만원을 법니다. 숨만 쉬고 2달을 모으면 500만원이 됩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서울 기준으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원 반지하 정도는 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반지하라고 반문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서울이니깐요.


원룸 근처에 석촌호수가 있습니다. 물론 걸어서 20분은 걸어야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도 집 근처라고 할게요.


창문을 열었을 때 옆집 담벼락이 아닌 볕도 좀 들었으면 좋겠고, 화장실은 계단 올라가서 해결하는 곳이 아닌 그래도 좀 깨끗했으면 좋겠고, 벽지에는 누수로 생긴 곰팡이의 흔적이 없어서 여름마다 곰팡이는 안 생기는 곳이면 좋겠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아주 가끔 홈트레이닝을 할 수 있게 침대 옆에 침대만 한 공간은 남았으면 좋겠다. 대략 신입사원, 아니 처음 자취를 시작하는 분들이 가지는 생각을 써봤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이렇게 집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참, 그러면서도 월세는 50만원을 안 넘겼으면 좋겠다까지요. 적고 나니 이런 집이 있을까 싶습니다. 여기는 이래서 좋은데 집이 5층 옥상이라 여름에 너무 덥지 않을까. 여기는 조금 위험한 동네라고 하던데 방범창이 없어도 괜찮을까. 꼭 하나씩 의문이 드는 집들만 보다 보면, 과연 내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이 있을까. 서울 월세는 어째서 이렇게 비싸고 나는 어째서 돈이 없는가와 같 실없는 질문을 하며 부동산을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한 달에 250만원. 월세 50만원 공과금 5만원 교통비 및 통신비 10만원 식비 30만원 경조사비 및 긴급비용 10만원 나머지 145만원을 일 년 동안 잘 모으면 1,740만원. 취업했으니깐 부모님 두 분 용돈 100만원 동생 첫 용돈 30만원 친구들에게 취업 턱 20만원 회사에 들어갔는데 좋은 옷을 입고 싶어서 백화점 매대에서 질 좋은 셔츠 2장 10만원. 자 그럼 벌써 160만원이 나갔습니다. 이미 조금 마이너스지만 날은 또 어찌나 더운지 생활비 3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돌이켜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피전문점을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킵니다. 하루에 10000원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벌써 2000원을 써버렸으니 이제 7000원으로 점심 그리고 저녁을 먹어야 합니다. 근처에 맛있는 돈가스집 생겼다고 잡아끄는 동기에게 냉정하게 회사 밥을 먹겠다고 뿌리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그래도 열심히 일한 나에게 돈가스(8000원)를 사줍니다. 정말 만원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천 원이나 넘겼으니 내일은 진짜 아껴서 9,000원만 써야겠다 다짐하며 침대에 걸터앉습니다.


혹시 근처에 가족, 친지라도 살고 있으면 축하드립니다. 월세 50만원 이상을 아낄 수 있습니다. 체감상 잠만 자고 숨만 쉬는데 들어가는 월세 50만원을 아끼면 600만원이 아니라 700만원쯤으로 뿌듯합니다. 저는 그래서 할아버지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설거지부터 요리까지 때 될 때 제때 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용돈을 주실 때 하는 덕담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월 최소 50만원씩은 아끼게 해 주신다고 생각하면 잔소리가 아니라 "전부 나를 생각해서 하는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음해서 자장가로 틀어도 돈을 아낄 수 있으니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해봅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싫은 건 아닙니다. 무척 즐거운 생활이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글을 작성해서 그렇지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손자와 함께 생활하는 게 여간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땀을 흘리면 씻는 게 좋은데 할아버지는 물이 아까워서 욕조에 받아 놓고 쓰시거든요. 그 물을 동내면 매번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번도 물을 채운적이 없네요. 이번에 방문하면 꼭 물부터 채워 넣어야겠습니다.

할아버지 집에서는 끝내주는 노을이 있었습니다. 벌레 막이 창이 없어서 모기랑 같이 생활한 것 빼곤 전부 좋았습니다.

많이 혼난 날은 출근길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며 의미 없는 부동산 어플을 확인합니다. 이런 그새 조금 더 오른 것 같네요. 할아버지께 더 잘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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