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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봉씨 Nov 20. 2021

프로필 트렌드


책을 만들고 난 뒤 늘 약력을 적는다.

" oo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창작 그림책 그룹 ooo에서 활동하고 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책 제목만 신간 구성으로 살짝 바꿔줄 뿐, 간편하게 복/붙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다가 오늘 프로필을 '부탁' 받으며 새삼 깨달았다.

몇 년 전부터 출판사에서 클리셰를 벗어난 프로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님, 프로필에 일률적인 약력 말고 책 내용과 관련되도록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프로필도 '창작'을 해야 하는 게 트렌드가 된 것이다.


오리가 음식을 만드는 책에는

"매일 고양이와 아옹다옹 싸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오징어를 사다가 둘이 나눠 먹으며 화해하기도 하지만 귀찮은 날엔 오리 식당 같은 곳이 어디 없나 하고 기웃거립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죽음에 대한 책에는

"하루하루가 소중해진 열두 살 고양이 나봉이와 지내며, 조금 느리게 그림책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채소에 대한 책에는

"채식을 하다 보니 수많은 채소들을 곁에 두고 있어요. 그래서 제게는 늘 사랑스럽고 변함없이 반짝이는 존재이지요.

영양 뿜 뿜 채소들의 응원과 사랑을 받아 건강한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 다양한 방법으로 그림책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구나 나는. 풋.


본문 내용과 관련한 프로필을 30분째 고민하고 쓰며

나는 뭘 써도 느리다는 생각이 다시 들고, 어쨌든 한 권을 마쳤다는 쾌감도 들고, 그림책 작가는 감성적으로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들고, 그러다가 프로필에 왜 이토록 진심이어야 하나 싶고, 책 한 권에 면지 , 도비라, 프로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출판사의 변화가 그리 싫진 않다고도 생각하며  프로필 어떻게 그럴싸하게 편집될까 하는 기대감 생겼다.

 그 짧은 프로필피곤한 '일'이 돼버렸지만, 작업의 가장 마지막 관문이기 때문에 그깟 두 세줄, 용서한다.


집을 언급해서 말인데,

 최근 프로필에 "대학을 중퇴하고 디자인 일을..."라고 적어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실물로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디자인 일을..."라고 바뀌어 출간되었다. 중퇴라는 단어는 불편한 건가?  

바뀐 두 글자에 마음이 상해버렸다.

그래, 글쓴이의 학력과 직업만으로도 홍보가 되는 교육책이니까, 그림 작가의 프로필만 너무 뒤처지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겠지.

꾸역꾸역 합리화와 자위를 반복했다. 

그러나 나의 가자미 눈은 '앞으론 학교의 '학'자도 안 쓰겠어.'라고 말했다. 



여름에 또 한 번의 프로필을 창작한다.

고민하고 설레고 아주 가끔은 기분 상하는 두 세줄.

독자는 쉽게 흘려보낼지언정 쓰는 이는 진심인 프로필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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