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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봉씨 Nov 26. 2018

엄마

행복했으면 좋겠어

엄마 손에 계속 컸더라면 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엄마여서 그동안 속속들이 성격을 알지 못했다.

이제 난 어른이 되었고, 엄마의 삶, 고충에 대해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알고 보면  엄만 늘 온화했던 게 아니라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고, 혼자 펑펑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와 닮은 점이 많다.


-


나는 유치원 때부터 위축되고 느렸다. 아니면 아빠의 기대가 높아 나 스스로가 난 뒤떨어졌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1학년 입학 직전부터 본격적인 똑순이 교육이 시작됐다."가락초등학교 1 학년 13반 19번 김미라입니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해 잠옷 바람에 돌돌 말은 종이로 아빠에게 탁! 탁! 맞아가며 거듭 연습했고, 집에 오면


"학교 끝날 때 가방 몇 번째로 쌌어"


"모르겠어"(그걸 누가 세.)


"늦게 쌌어?"


"응"


"아빠가 빨리 싸랬지. 넌 둔순이야. 둔해"


이 질문이 거듭되다 보니 나중엔


"... 네 번째...(거짓말.)"


"잘했어. 내일은 첫 번째로 싸"

.

.

정말 난 바보인 건가 싶던 일 중 하나는, 그렇게 억지로 빠릿빠릿한 척하며 지내다 보니 교가 끝나면 재빠르게 집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화장실도 못 가고  두 허벅지를 비벼대며 걸었다. 결국 도로 옆 풀숲에 주저앉아 오줌을 졸졸 쌌고, 그때 하교 중인 친구랑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 일은 그때 입은 내 옷까지 기억날 정도로 선명하다. 쯧.


내가 받은 불조심에 관련한 첫 상장도 기억난다, 선생님이 "이 그림 그린 사람 누구야?, 소방차 호스 그린 사람." 계속 물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이 네가 그렸다고 알려주어 수줍게 나갔었는데 , 그 뒤로 난 가족의 칭찬세례로부터 꿈이 화가여야만 했다.


각설하고 다시 아빠 이야기로 돌아와 이래저래 어리바리 떤다는 이유로 아빤 늘 나를 내놓기 불안한 아이로 생각해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도 집에 조금 늦으면 당시에 타던 짙은 청록색 소나타 차를 당장 출발할 듯이 집 앞에 대기시켜놓. (지금도 이따금씩 불면증을 일으킬 성범죄를 겪었었기에 당시 가족은 예민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내가 제일 예쁘다며 세 자매 중 가장 애착을 표하기도 했지만, 뭘 해도 느리고 답답한 아이라는 인식을 적극적으로 심어주기도 한 장본인이라 난 늘 부족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폄하하게 되었고,  '어른되면 애도 못 낳을 거야. 몸도 평범치 않을 테니.'라는 생각은 20살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반면 엄마는 나에게 집착하지 않고 혼내지 않았다. 엄마도 폭력적인 아빠에게 위축되어서 피동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편식이 심했는데,  양념된 깻잎을 먹어보라는 마의 말에 투정 못 부리고 입에 넣었다가 밥상머리에서 구역질을 했다.

김치와 깍두기를 씻어 먹이느라 내 밥그릇 옆엔  늘 파란색 물컵이 자리했는데, 그 고춧가루 둥둥 뜬 물이 지금까지 떠올라 고춧가루가 많이 보이는 차가운 음식은 지금도 싫다.


 4학년 무렵, 외갓집에 잠시 살았을 때 마가 내 숟가락 위로 아주 잘게 자른 김치 조각을 올려주었다.

(그 당시엔 엄마랑 잠자리채 들고 다니며 내가 사 온 병아리 먹이를 구하고 다니던, 즐겁고 교감 가득한 시기였다. 뭐든 게 긍적적이었던. )


엄마의 마음을 위해 한 입 먹었다.

읍.


"어때, 맛있어?"


"맛있어."


"그봐 , 맛있지?"

엄마는 젓가락을 들고 서서 울먹거렸다.

그 목소리가 또 신경 쓰여서 한 번 더 먹었다. 엄마는 감동했다. 당시 엄마는 얇은 유리를 대하듯이 날 대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 더 줄까?"


"아니"


두 번이면 됐다. 나도 부응의 한계가 있었다.

그 이후로 내게 김치를 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


초 5 때 엄만 신촌 오피스텔에서 하숙집을 운영하고 아빠는 그 오피스텔 작은 주차장에서 주차관리를 했다.
편하게 일하는 아빠,
20인분의 밥을 하는 엄마.
내 눈엔 그랬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마와 종종 마트를 동행해 무거운 짐을 나눠들고 부엌에서 내게 요리를 알려주며, 딸이 기분 좋게 도울 수 있도록 하숙생들에게 "미라가 다 만든 거야, 요리에 소질이 있어"라고 칭찬을 했다.  식사 준비를 매일 돕진 않았지만 엄마의 칭찬에 힘입어 부엌이 조용해지면 몰라면 정을 만들고, 라면 볶음도 만들어대는 적극성이 생겼고, 수줍게 엄마에게만 맛을 선보였다. 

칭찬과 관심이 필요했 중등 시절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여전히 공부에 관심이 없었지만 부모님께 혼난 기억은 없다. 아빠 가출이 잦은 언니를 잡 두들겨 패고, 엄마는 언니 걱정에 눈물 마를 새가 없던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아빠가 예전에 느꼈던 둔한 나의 모습은 "넌 역시 착해. 말을 잘 들어. 넌 잘못 할리가 없지. 설령 그렇다한들 분명 언니가 시켜서 한 걸 거야"라는 믿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언니는 유치원 때부터 소심한 나와 다르게 외향적인 똑순이었고, 반장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했으며 엄마에게 촌지를 보내라고 보챌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튀고싶던 욕망이 겁없는 비행소녀를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걱정할 일 없던 활달한 언니가 문제아로, 걱정 많던 조용한 내가 효녀가 되어 버리 건 정말 원치 않는 운명의 뒤바뀜이다.


시험기간이 되면 난 착한 아이니까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방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아래층 하숙생 방을 쓰는 언니 방으로 들어가 공부하는 척했다. 그곳에는 엄마랑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언니가 있다.  

내겐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책을 들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쫒아다니며 속으로 질투했다. 대화하는 엄마와 언니를 등지고 책을 펼치고 앉아 커터칼로 팔에 자근자근 생채기를 냈다.

오만상을 쓰며 손톱깎이로 볼록 튀어나온 점을 떼어내기도 했다.

반곱슬 머리카락을 100개 넘게 뽑아 교과서에 수북이 쌓았다.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는 사람 없다.

내 모든 행동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만 빼고 하는 비밀 얘기를 엿듣기 위한 수단이었기  그냥 산만한 행동일 뿐 별 일이 아니었다.

(성적은 엉망진창)


나는 지금까지도 가족에게 애착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관심 없을 거란 전제가 있기에 20살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걸 의논없이 혼자 결정하는 건 당연해졌다. 통보면 된다. 혼자 벌어 생활하고 배우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내 결정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 외의 기억은

아빤 앉아서 신문을 보고, 엄마는 12개 방이 딸린 아래층 하숙집 긴 복도를 무릎 꿇고 박박 닦아내던 모습. 아빠는 나빴다.

 

고 2.
부모님 이혼이 결정되고 가족이 모여 앉았다. 아빠의 주도로 이루어진 중대 회의에서

"엄마한테 갈 사람 있어?"라는 선택사항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엄만 그날 가방만 끌고 외롭게 떠났다.


내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하길, 엄만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난 엄마가 훨씬 좋았는데 그때 왜 말도 못 꺼냈는지 어른인 지금 생각해보, 무서웠던 아빠의 주도로  이루어진 가족회의에서 잔뜩 았었다.

반하는 얘길 했다가 혼날까봐 무서웠다.


내가 조금 용기를 내서 엄마를 따라갔더라면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누구를 따라가던 삶은 윤택하지 않았을지언정 언니에게 쏟았던 관심이 내게 나뉘어 칭찬받는 아이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에 대한 깊은 미련과 후회는 슬픈 과거를 소환한다.




오늘  과거 파편들 떠르는 이유  엄마랑 통화하고 나니 슬퍼서이다.

지금은 엄마가 좋은 분 만나 더 행복해졌음엔 틀림없지만, 안정화된 삶과는 별개로 아직까지 가족 일에 관해선 본인의 감정을 돌보지 않은 채 정신적 희생을 지속하고 있 같다.


엄마가  힘들 때 남보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조금 이기적으면, 그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날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엄마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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