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속을 걸었다.
비가 채색하는 세상은 익숙했던 모든 장면을 새롭게 하여
이 커다란 세상 속에
작은 우산 하나뿐인 나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그 지혜롭고 준엄한 비의 향을 뚫고
라일락 향이 느껴졌다
너는 우산도 없이 무한한 빗방울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었다
경외로운 그 자태에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다리부터 허리까지 빗물이 침범해 올라왔다
손톱만 한 꽃잎을 너는 결코 놓지 않는구나
쉴 새 없이 뺨을 치는 빗방울에도 너는 우직하게 향을 내는구나
그런데도 나는 이 우산을 내려놓을 용기조차 없다
어느새 비의 침입은 두 뺨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