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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l 10. 2023

금 송아지

내가 만든 신

[출애굽기 32장 1절]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부재를 ‘신의 형상’으로 대체하려고 했다는 것을 주목하길 바라요. 형상을 가진 애굽의 신들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그들을 실제로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 향하고 있었던 거였죠.


그런데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이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봐요(출 19:16).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어요(출 24:17).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경험하고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것, 즉 모세처럼 ‘상대할 수 있을만한 것’을 원했던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조차 ‘형상’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따라서 ‘형상’을 원하는 것,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어요(출 20:4).


여기서 ‘형상’은 우리의 육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해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에 근거하지 않고, 우리가 육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즉 사건과 현상과 감정과 느낌, 논리적 사고, 납득할 만한 설명, 합리적 추론 같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금송아지 같은 우상을 만들어 낼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언제 내려올지도 몰랐고, 모세가 번개와 불과 구름이 가득한 그 산에서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이 주는 착각, ‘모세는 죽었다’는 착각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어요. 아론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거였죠.

그들은 믿음으로 기다려야 했어요.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이 그들을 기다리지 못하게 부추겼던 거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안심시켜 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임재가 아니라 ‘형상’이었어요. 백성들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길 원했던 거죠.


[출애굽기 32장 4-6절]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들은 마침내 자기들이 가진 좋은 것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것으로 인해 안심했어요.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몰려왔죠. 그러자 금세 그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했어요. 시내산 위에 올라간 모세는 이미 잊어버렸죠. 그리고 자기에게 평안을 준 이 존재를 “여호와”라 부르고, 기쁨을 준 이 날을 “절기”로 정해버렸어요.


선입견을 없애고 이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이 짓눌려 있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형상을 만나고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요. 얼마나 은혜가 충만한 예배처럼 보였을까요? 우리가 예배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느낄 때와 무엇이 다른가요?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려고 한 게 아니에요. 자신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바로 그 여호와를 예배하려 했던 거였어요.


어쩌면 이들은 모세라는 ‘중보자’ 대신에 ‘다른 중보자’를 원했던 걸 수도 있어요. 모세를 신으로 여긴 게 아니었다면, 송아지 형상도 그 자체가 신이 아니라 그저 모세의 역할을 해주는 존재로 여겼겠죠. 그래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렇다 할지라도 중보자는 그들이 고안해 내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뽑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었듯이 말이죠(행 7:35).

중보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여 보내셨고, 모세가 증언했던 것처럼 ‘나와 같은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유일한 중보자로 보내주신 거였죠.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주고 있는지 보이시나요? 우리가 원하는 예수, 우리가 만들어낸 예수, 우리를 즐겁게 하고 평안하게 해주는, 우리를 위한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중보자’가 아니라 금송아지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예수’라고 부르고, ‘여호와’라고 믿고, 경배하고 즐거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라 불리는 가증한 것을 향해 진노하시죠.


그들의 그 평안과 기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자기들이 스스로 취한 것이었어요. 그들에게 중요한 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어요. 결국 그들이 추구한 것, 숭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그분 자체가 아니라 자기의 행복이었던 거죠. 하나님도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시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것, 이게 금송아지고, 이게 우상 숭배예요. 


예수님도 자기를 위하는 베드로를 향해 거침없이 ‘사탄’이라고 부르셨어요. 우리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금송아지에 제사를 지내고 있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행복, 나의 비전을 추구하면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를 취하는 것. 도무지 하나님의 시간과 일하심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해서 내 마음에 좋을 대로 행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불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나요?


[출애굽기 32장 7-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어떻게 이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지는 걸까요? 하나님은 이런 부패한 마음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말씀하세요. 부패한 마음이 얼마나 신속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지 보이시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좋게 해주는 것들을 향해 신속하게 나아가지 않았나요?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여호와의 산에서 말씀이 내려오길 기다려야 했어요.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알지 못할지라도,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이것을 여러 번 경험하게 하셨고 배우게 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19장의 그 경험을 기억하며, 모세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저 산에서 내려올 것을 믿고 기다려야 했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따라 성급하게 결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겐 무엇보다 나의 행복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를 이 불안과 두려움에 내버려 두실리 없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거죠.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기 행복을 위해 선택하고 결정해 놓고,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자기가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니까 이게 주님의 뜻이라고, 주님도 이것을 허락하셨고, 기뻐하신다고 여겨 버리는 거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명백히 틀렸고, 심지어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되는 사탄 마귀의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시는 분이에요(빌 2:13). 베드로는 하나님을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라고 소개하죠(벧후 1:3). 그러므로 참된 여호와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행복으로 향하게 해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원리를 강조하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다.’라는 주장과도 달라요. ‘하나님의 행복’이 최종 목표이자 최고의 목표이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행복’은 부수적인 것일 뿐인 거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행복’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돼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만이 중요하죠.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니라 자기 행복을 추구하던 자아는 죽고 새로 태어난 새롭고 거룩한 본성으로 그렇게 살게 되는 거예요. 그 새 사람은 진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거죠.


성경에서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을 때’로 한정지어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의 행복, 나의 평안을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과 하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거죠. 정확히는 하나님 그분 자체가 ‘행복’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거죠. 그러니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행복은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행복과 완전 다른 성질인 거예요.


여러분에게 아직 나의 행복과 나의 안위가 중요하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 나의 행복과 안위가 고려하게 되는 요소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참된 믿음의 삶, 곧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 어떻게 하시나요? 육체로 느껴지는 것들을 근거 삼지 않나요? 무슨 말이냐면,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내 감정이나 판단이 완전히 반대될 때, 여러분은 무엇을 따르시나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각과 감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죠? 그렇게 고백하기는 쉬워요. 근데 정말 그렇게 사나요? 정말 하고 싶지 않아서 슬퍼하거나 의심하거나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그 명령에 복종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억지로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세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 또한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 없이도, 기다림 없이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실제로 그렇게도 일 하세요. 그러실 때면 그의 피조물이자 소유요 종들인 자들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반응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 마음에 감동이 없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거나 그 말씀에 당장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만약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요나, 예레미야, 사무엘 같은 성도들의 순종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동의되는 마음도 없었고 심지어 싫어하기도 했는데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여러분을 압도하는 이끄심,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뜻에 반하는 명령을 경험해보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하나님이 금송아지는 아닌지 진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시길 바라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근거는, 여러분의 평안과 행복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요. 그리고 그 말씀은 나의 상황과 감정과 판단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죠.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점검할 수 있게 되길 축복해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행복을 최고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 추구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기 시작하실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행복으로 나아갈 길은 없으니까요.

십자가는 고난과 배척이에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오해를 받는 거죠. 금송아지를 섬기는 신앙은 절대 이런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아요. 한사코 십자가를 거부하기에 결국 참 중보자를 만날 수 없게 되죠. 백날천날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그것을 여호와라, 예수라 부르고 그 앞에서 즐거워해 봤자 소용없어요.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산다고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테니까요.


여러분이 만든 예수, 여러분에게 딱 맞는 하나님을 당장 버리고 저 시내산의 두려운 영광으로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진짜 중보자를 믿음으로 기다리고 구하고, 영접하게 되길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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