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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n 27. 2023

예정에 대하여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에 대해 많은 질문과 의심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죠. 그렇다 보니 예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정하심을 알려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예정을 아는 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신뢰하고, 주를 믿는 믿음이 견고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예정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가장 먼저 ‘예정’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실체라도 왜곡된 렌즈를 통해서 보면 괴상하게 보이니까요. 예정하심에 대해서 특히 이런 안타까운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 관점부터 바로 잡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죠. 


1.’ 예정’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일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정은 창세 전에 일어난 일이란 걸 알 수 있어요(엡 1:4).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에서 빛을 창조하신 사건을 보면서 시간도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즉, 하나님의 예정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정은 시간 밖에서 일어난 일, 즉 시간과 상관없는 일, 그래서 시간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일이라는 거예요. 이게 예정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에요. 따라서 예정을 시간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오류에서 출발하는 거죠.


2. 사람은 ‘시간’을 벗어나 사고할 수 없다.

 사람은 생각을 통해 모든 것을 인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죠. 그리고 사고(思考)는 언어로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떤 이미지로 경험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 정보들도 그것들이 인지와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의 형태로 서술되어야 하죠. 그럴 때에야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게 뭔지 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언어는 반드시 ‘시제’가 필요해요. 어떤 문장을 만들던지 거기엔 시제가 존재하죠. 즉, 우리의 언어는 시간을 벗어나서 문장을 형성할 수 없다는 얘기고 따라서 시간을 벗어난 인지와 해석과 이해가 불가능하단 얘기가 되죠.


3. 사람은 ‘시간’ 밖의 일인 예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로는 시간을 벗어난 일에 대해 조금도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요. 같은 이유로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실 때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양한 시제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는 예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는 예정을 믿음의 영역에 두어야 해요. 이것을 제자리에서 이탈시켜서 이해의 영역으로 가져오려 할 때 문제가 생기죠.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 하니까 전제가 잘못된 질문들이 우후죽순 솟아나고, 그것에 답하지 못하는 ‘예정론’과 그것을 핵심 교리로 여기고 있는 기독교 자체가 틀렸다고 단죄하기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엔 큰 실수와 교만이 있죠. 실수는 예정을 대하는 관점이 제자리에서 이탈된 것과 그 결과로 생긴 질문들 자체가 틀린 거였고, 교만은 그 질문들을 던지는 자신의 전제가 확실하다는 맹신과 만일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들으면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인지하고 이해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예요.


*


 그러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예정하심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알려주셨을까요? 앞서 저는 이것을 알려주신 이유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죠. 그런데 인지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걸까요?

 답을 먼저 하자면, 예정을 알려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결말’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생각할 때 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요. 우리는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에 대해 말할 때 동시에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도 함께 하시는 걸 볼 수 있죠.

 우리는 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지금 이 사건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말을 소망하면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나름의 전략과 철학을 가지고 좋은 결말을 예측하고 전망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마음의 불안과 염려를 해소하려고 하죠.


 하지만 그런 노력은 다 헛되요. 지성인들은 이미 미래 예측이 얼마나 공상에 가까운 행위인지 자각하고 있죠. 결정적으로 헛된 이유는 사람은 다 죽기 때문이에요. 전도자의 말처럼 아무리 노력해서 많은 성과, 좋은 성과를 거둔다 해도 결국 죽으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려요. 사라져 버려요. 어떤 삶을 살았다 해도, 부자도 거지도 왕도 노예도 다 같은 결말,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전도자가 뛰어난 지혜로 발견한 진리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을 예정하셨어요. 이 예정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다른 결말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를 믿는 자의 결말을 달라요. 이 다른 결말을 믿는 자의 삶은 믿지 않는 자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죠.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은 어떻게 살더라도, 심지어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살더라도 그 결말은 죽음일 뿐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죽음은 ‘죄의 삯’이라는 걸 기억해야 해요. 즉, “모든 것이 다 죄였다”라는 선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죠. 하지만 믿는 자들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요. 모든 것이 선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신 거였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의 8장의 본문도 예정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어서 보면,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어요. 미리 정하신 그들은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말해요.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때에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그들의 삶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죠. 이 미리 정하신 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이 하나님의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안에 있게 돼요. 이게 그들에게 예정된 삶이고 결말인 거죠.

 이런 결말이 미리 정해져 있음을 믿는다면, 어찌 불안해하고 염려할 수 있겠어요? 오늘 내게 닥친 일이 마치 나를 위기에 빠뜨리거나 망하게 하는 것처럼 놀라고 두려워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구약의 선지서들과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할 때 이 결말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위로와는 완전히 다르죠. 공감해 주거나 이해해 주거나 마음을 다스릴 부드러운 말들로 응원해 주는 게 아니라 붙잡고 일어설 확실하고 불변하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요. 그 사실, 그 결말을 믿는 자에겐 이것만 한 위로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 결말이 미리, 확정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예정하심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에 핵심이죠.


 그 결말이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다 이기셨다는 거예요. 그의 아들을 주신 분께서 그의 아들보다 덜 귀한 다른 모든 것들도 다 주셨다는 거예요. 안 죽는다는 거예요, 안 망한다는 거예요, 이 결말을 이미 다 예정하셨다는 거예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다 결정된 거여서 그 뒤에 창조된 것들이 결코 이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아무리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도, 지금 내 상황이 아무런 소망이 없고, 진퇴양난이라 할지라도 그런 건 내가 안 망한다는 결말, 내가 이긴다는 결말, 내가 안 죽는다는 결말에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앞서 언급한 로마서 본문에 이어서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결론을 짓고 있어요.

 오직 이것을 믿는 자만이, 건방지게 이해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결말을 예정해 주신 분을 믿는 자만이 이 믿음 안에서 참 평안과 자유와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에게 예정하심을 알려주신 이유예요.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도 충분하지 않나요?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다 복이라는 걸 믿으시나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그러나 우리의 죄성이 그것을 악용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시나요?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도 악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이 죄인인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우리 안에는 예정을 자기 멋대로 휘둘러서 자신과 타인을 실족하게 해 놓고 그 예정을 주신 하나님을 탓하는 죄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해요. 만일 지금까지 그랬었다면 이 시간 회개하시길 바라요. 

 하나님께서 예정하심을 알려주신 것 또한 우리에게 복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본의에 맞게 받고 사용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겸손히 만물의 주관자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에게 좋은 결말을 예정해 주신 그분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의지하며 새날을 살 수 있어요. 이 믿음과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더해 주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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