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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May 08. 2023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참 복음과 거짓 복음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고 계신가요?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간절히 찾고 구하고 계신가요? 혹시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제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매일 주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라고 고백하시면서 말이죠.

 만일 그렇다면, 참으로 애석하게도,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더 원하게 되고 더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이죠. 다윗도, 바울 사도도, 베드로 사도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에 대해 생각하며 진리에 대해 말하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위해 인생 전부를 걸고 살아도 그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예, 그게 ‘진리’여도 말이죠.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을 보시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들은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진리를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처럼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과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진리에 속한 자'였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라고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모른다고 합니다. 자기와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결말입니까? 얼마나 끔찍한 최후입니까? 우리가 진리에 대해 아무리 생각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주장해 봤자 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진리를 내 마음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접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요 6:51)


    예수님은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자기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과 먹는 것은 매우 유사합니다.

 죄인이 자기의 지극히 절실한 결핍을 진정으로 의식하면, 자기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자각하면,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그가 영원히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일단 깨닫기만 하면, 그는 아무런 권고도 필요로 하지 않고 즉시로, 그리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배가 고프면 그는 아무 질문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아무런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자기 앞에 제공되는 음식을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먹어 버릴 것입니다. 먹는 것은 절실한 필요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끄시기’ 시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아무나 예수를 먹을 수도 없고, 예수를 먹겠다고 결단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부르시는 자라야 가능합니다. 아무나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자기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아무나 자기의 소망 없는 상태를 직면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그 죄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22-23절에 무서운 경고의 예언을 하시면서 앞뒤로 동일한 말씀을 두 번 반복하시면서 강조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것이 진리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입니다. 진리를 마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먼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그의 새 생명이 됩니다. 진리가 그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께서 육신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것처럼 이제 그 사람의 육신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삽니다. 그리스도가 행하십니다.

 진리를 영접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행하지 않고 자기가 행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말할 때도 우리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 사람 안에 들어가 본 적도 없으시고 그 사람의 육체를 통해 손가락 하나 까딱해 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사칭했으니 도리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온갖 그의 매력을 가진 채 나에게 제시된다고 합시다. 나는 그의 놀라운 인격을 존경할 수도 있죠. 나는 그의 완벽한 삶을 찬양할 수도 있죠. 나는 그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온유함에 감동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잔악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나의 것으로 삼을 때까지는, 내가 그를 나의 것으로 영접할 때까지는 나는 구원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해도 내가 그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그 음식은 내 것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 밖에 있었던 음식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소화되어 일부가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할 때에야 나의 밖에 계셨던 그가 내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겁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자기의 ‘살’을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며,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자일뿐 아니라 여기에 죽으러 오신 자로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깨어난 죄인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라볼 때, 그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나는 파멸된 자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성령께서 사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아름다운 장면들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와 전혀 ‘같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말의 여지없이 나는 예수님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방법과 나의 방법은 동과 서가 서로 다르듯이 다릅니다. 예수께서 살아야 마땅하신 분이셨기에 죽음에서 생명이 되셨다면, 그 반대로 나는 죽어 마땅하기에 모든 생명을 빼앗기고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는 것이 여호와의 살아계심 만큼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께서 사신 길을 찬양하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를, 예수님을 닮기를 바란다 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그런 마음의 열망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그 진심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진심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를 향해 아무리 진심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비참한 죄인들이 자기의 극심하고 엄숙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 안 뿐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천국은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복음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진수성찬은 차려졌고 여러분은 초대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하란 말일까요? 죄를 회개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도덕적 죄악들도 회개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 내가 죄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악 중에 출생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잉태되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악한 존재’를 제거하는 수술 같은 게 아닙니다. 그 악한 존재가 일으키는 죄 문제를 해결하면 내가 회복되고 온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그냥 끝장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도 죄 자체가 되셨습니다(고후 5:21). 예수님은 나무 위에 '뱀'이 되어 달리셨습니다. 어린양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그 어린양이 내가 되고, 죄가 된 것처럼 예수께서 내가 되고 죄가 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뭐라고 죄와 우리 자신을 분리합니까?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회개할 때 죄와 자아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었는지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쉽게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괴롭히고 속박하는 악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부르건, 악한 영, 귀신, 마귀라고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그 악한 존재가 나를 억누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길 갈망한다고 말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진 않으셨나요? 회개할 때 여러분의 기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 제가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주여, 이 마귀가, 이 악한 영이 나를 괴롭게 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이런 식의 기도는 아니었나요? 이런 식의 기도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성경과도 맞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온 회개 기도들을 보세요. 그것들은 하나같이 자기 존재를 회개합니다. “화로다 나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우리 존재 자체가 죄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물으시는 겁니다. 죄의 삯인 사망을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나’라는 존재가 있고 이런 나를 죄짓게 하는 ‘악한 존재’가 있는 것이라면, 공의로운 재판관은 왜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나를 심판하는 걸까요? 이게 정당합니까? 그 악한 존재에 저항할 능력 없이 끌려다니는 나 역시 피해자 아닙니까? 힘없고 가련한 나를 자신의 악한 일의 도구로 이용한 그 악한 존재를 심판하는 것이 정의 아닌가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의 회개를 방해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탓하는 것은 죄인의 오래된 추태입니다(창 3:12). 마땅히 회개해야 할 때에 ‘악한 존재’를 탓합니다. 그 악령이 문제라고 핑계 대면서 ‘대적기도’라는 것으로 예수의 이름을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귀를 쫓아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기도의 행위로 위장한 퇴마 의식이야 말로 마귀가 기뻐하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십니까? 마귀는 “나를 핑계 삼아. 내가 너를 죄짓게 했어. 내가 나쁜 존재야. 나를 욕하고 나를 비난해. 나를 하나님 앞에 고발해!”라고 부추깁니다. 왜 그럽니까?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회개야말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요, 죄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해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핑계를 그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 자체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회개는 당연히 선행되는 것입니다. 이건 생각할 것도 계산할 것도 없습니다. 맹인이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보면 그냥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매 순간 새로워서 도무지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를 그칠 수 없습니다. 회개를 그친 자들은 죽은 자들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을 분리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바로 그 죄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가 심판받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불에 여러분 자체가 소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신뢰함으로 이삭을 죽인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만이 그 독생자, 그 예비하신 숫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살리시는 분은 오직 아버지이십니다. 누구를 다시 살릴지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선하심에 매달려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과 자비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간절히 찾고 구하고 계십니까? 혹 이런 목마름과 굶주림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여러분은 죽은 것입니다. 여태껏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들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를 죽이는 행위였다고 성경은 고발합니다(요 8:40, 16:2). 이 말씀 앞에 아무도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핑계 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자기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죠?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오직 진리 자신으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다 죽음을 선고받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우리를 썩어지고 부패하고 쇠하여 간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는 추락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는 지금 멋지게 다이빙하고 있어”라고 말한다거나 팔을 휘저으면서 “나는 지금 자유롭게 날고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바닥을 만날 때 터져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비유로 계속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은 동아줄입니다. 이 밧줄을 잡으라는 것이 전도입니다. 여러분 이 밧줄을 잡아야만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밧줄을 잡습니까? 오직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닫는 자뿐입니다. 정신 차린 사람, 잠들었다가 기절했다가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뿐입니다. 밧줄을 잡는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밧줄을 잡으면 손바닥이 다 쓸려 나갈 겁니다. 손가락 뼈가 부러지고 인대도 끊어질 것입니다. 어깨가 빠지고 갈비뼈도 부러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다고 해서 밧줄을 놓을 사람은 없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밧줄을 붙잡을 것입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살고 싶으니까요. 이것 말고는 살 길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 밧줄을 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를 붙잡길 원합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길 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길 원합니다. 회개하세요. 구원받으세요. 이 둘은 동의어입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거울을 보세요. 거기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창조주를 대적하는 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세요. 구원받으세요.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이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기 시작했다면, 이미 아버지께서 당신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니까요.


*본 회퍼 '나를 따르라'를 기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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