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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Feb 24. 2024

영화_괴물怪物


“괴물은 누구게?”



미나토의 싱글맘 사오리의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아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이 의심되어 학교를 찾는다. 그러나 교직원들의 행동이 이상하다. 그들의 행동은 인간 같지 않다. 인간적인 대화가 되질 않는다. 분노도 회유도 통하지 않는 이 답답함 속에서 사오리는 홀로 아들을 지키고자 고곤분투한다.


이어서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오리의 눈으로 호리를 본다. 그의 말과 행동 모두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처럼 보이기도 해서 호리와 함께 있는 여자가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사오리의 눈으로 봤던 호리와 같은 인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다른 남자가 서 있다. 그가 남들과 달랐던 것은 괴상함이 아니라 순수함이었다. 그의 행동이 유별났던 것은 위선이 아니라 정직이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 선 괴물들이 그의 삶을 온통 망쳐난다. 결국 그는 지붕 끝자락에 서게 된다.



이제 영화는 미나토의 시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앞선 장면들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미나토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당혹감을 느낀다. 일련의 사건 속 진짜 괴물은 같은 반 학생들이었고 요리의 아버지였다. 그제야 스쳐가며 봤던 그들의 언행들이 다시 생각난다.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사오리도, 호리도, 그리고 우리도 사실은 이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모두가 괴물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오리에겐 교직원들이 괴물이었고 교직원들에겐 사오리가 괴물이었다. 호리에겐 교직원들과 세상이 괴물이었고 그들에겐 호리가 괴물이었다. 반 아이들과 요리의 아빠에겐 요리가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이 편과 저 편을 오가며 동조했던 관객들도 괴물이었다.


어떻게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가 피해자가 됨으로써 시작된다. 정확히는 피해자라는 권리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권리 의식은 가해를 정당하게 만든다. 가해는 방어행동이고 보호본능이며 따라서 정당하다,라고 믿게 만든다. 그 가해는 타인을 피해자로 만들고 괴물로 만든다. 이 연쇄 작용은 멈출 줄 모르고 증식한다. 

현대인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 ‘겁먹은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안전한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시대보다 외출(노출)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우리를 예민하게 만든다. 예민함은 사소함을 확대한다. 사오리와 교직원들의 첫 대면은 예민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서로를 괴물로 만드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비추는 이 거울을 통해서 괴물을 두려워하다가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 버리는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다.



“괴물은 누구게?”



영화는 이것을 묻지만, 사실 영화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이 질문에 반응해 줄 ‘누군가’였다.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직접 들은 사오리와 호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치 들은 적 없는 것처럼.

그리고 끔찍하게도, ‘나머지’들은 이 질문에 침묵함으로써 질문자를 괴물로 만든다. 폭력을 방관하는 자들 또한 가해자인 셈이다.


오직 요리만 이 질문에 대답한다. 자신이 괴물이라고,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는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요리만, 등장인물들 중에 가장 큰 고통 속에 있는 요리만 즐거워 보이고 평범해 보인다. 요리만 밝고 명랑하고 순수하다. 요리는 꾸밈이 없고, 자기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강압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요리의 시선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사건의 주요 인물인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요리의 시선만 말이다. 우리는 요리를 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만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 인물들보다 요리에 대해 더 쉽게,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그건 아마도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진실한 존재가 요리이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모든 인물들은 겉과 속의 다름이 보이거나 느껴지는 반면, 요리는 그 겉모습만으로도 그 속이 다르지 않다는 믿음을 줄 만큼 정직했다.


미나토는 갈등 속에 있다. 요리를 보면서 자신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괴로워한다. 요리가 당하는 집단 따돌림을 어른들은 보지 않고 세상(TV)은 장난이라고 말한다. 비로소 자신도 괴물임을 인정할 때 그는 평안을 찾는다. 갈등의 폭풍우가 끝이 나고 따스한 볕이 가득한 동산을 뛰놀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괴물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괴물들 속에 살고 있다. 나도 요리처럼 말할 수 있을까? 괴물처럼 말하고 행동하라는 강압에 맞서 정말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믿는 바를 진솔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차라리 머뭇거리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폭발해 버리는 미나토에 가까운 것 같다.

폐차된 녹슨 기차 안에서만 잘난 듯 떠드는 겁쟁이가 아니라, 요리처럼 교실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웃으며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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