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루 Jun 17. 2018

새소리와 숨소리뿐

 새소리와 숨소리뿐. 허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빼곡한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날이 참 좋다.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삽을 움켜쥐고 균형을 잡았다. 이 막대기 없인 서 있을 수 없는 노인네 같은 자세였다. 다시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의 습한 기운인지 내 땀인지 모를 불쾌함만이 모든 촉각에 맴돌았다.


삭, 삭,

 이젠 삽질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깜빡 졸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 야간 행군을 할 때 사람이 걸으면서 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처럼 생명은 악착같다. 삼일째 잠을 자지 않아도 내 정신이 이렇게 또렷한 걸 보면. 물통 주둥이에 뭍은 흙을 털어내고 물을 마셨다. 혀가 굳어버렸는지 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땀을 닦아내며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제법 깊다. 낡은 이불로 꽁꽁 싸멘 그것을 구덩이 옆으로 바짝 붙였다. 어느새 바위처럼 굳어버려서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이불 틈 사이로 고약한 냄새가 올라와 고개를 돌렸다.


 발로 밀어 구덩이로 굴러 떨어트렸다. 깊이는 적당했지만 길이가 좀 짧았다. 어정쩡하게 걸려있는 다리를 구겨 넣으려 구덩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자세를 바꿔가며 안간힘을 써봤지만 이미 굳어버린 다리가 좀처럼 구부러지질 않았다. 씨발. 욕을 내뱉자 다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 나니 좀 괜찮아졌다. 내 본능은 바람을 쐐야겠다며 날 구덩이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하얀색이 되고 있었다.


 잠들 뻔했다. 등줄기로 한기를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무심결에 잡아든 삽을 들어 그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몇 번을 휘둘렀더니 뼛소리가 나며 부러졌다. 발로 밟아 더 깊이 꾸겨 넣었다. 뼈가 부러진 무릎이 안쪽으로 접히면서 돌돌 말려 있던 이불 사이로 그의 발가락이 튀어나왔다. 겨우 구토를 참고 서둘러 흙을 덮었다.


됐어. 이제 됐어.


 나도 모르게 나에게 계속됐다고 하고 있었다. 다 끝났다. 이제 흙만 덮고 흔적만 지우고 다시 조심히 내려가면 된다. 집에 도착하면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잠을 자고 싶다. 자고 싶다. 이걸 다 끝내고 나면 이틀이고 삼일이고 잠을 자고 싶다. 이젠 정말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악몽도 없고 뒤척임도 없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 더러운 인간이 여기 누워있으니까, 매일 날 좇아오는 사람도 소름 끼치게 하는 시선도 이젠 없으니까.


 흙을 다 덮고 이파리와 잔가지를 그 위에 덮었다. 삽을 챙겨 들고 비틀대며 산을 내려왔다.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붙잡고 쉬어가길 반복했다. 최대한 멀리, 아무도 모를 이름 없는 야산을 찾아가기까지 이틀이 걸렸는데 돌아오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한여름의 태양은 유난히 길었다. 겨우 집에 도착했다. 불을 켜니 난장판이 된 원룸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부서진 선풍기를 먼저 치우고 넘어진 건조대를 일으켜 세웠다. 속옷을 다시 널어놓다가 망가져버린 브레이지어 두 개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알몸인 채로 샤워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아직 물이 차가웠다. 세면대에 덜 지워진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자고 일어나서 락스로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샤워기 밑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가슴까지 늘어진 머리칼을 타고 뜨거운 물이 발끝에 떨어졌다. 머리를 감으려 팔을 들었는데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몸엔 샤워볼을 쥐고 몸을 닦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까스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속옷장을 열어 팬티를 꺼내 입고 배게 뒤에서 티셔츠를 찾아 입은 뒤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쓰러졌다. 자자. 이제 그만 자자. 푹 자고 일어나서 마저 방을 청소하고 세차도 하고. 아, 화장실도 청소하고.


*

"어제 강원도의 한 야산에서 심마니에 의해 발견된 암매장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수사를 벌인 경찰은 오늘 오전 11시경, 자택에서 용의자를 검거했습니다. 경찰은 근처 CCTV를 확보하여 용의자를 추적하였고 오늘 오전 용의자를 검거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한 상태라고 전해왔습니다. 시신으로 발견된 김 모 씨는 수차례 성범죄 전과가 있던 것으로 밝혀졌고 전자발찌 착용 명령을 받았지만 시신으로 발견되기 1주일 전에 전자발찌를 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와 관련된 책임 문제에 대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

"얼마 전 살인 및 시체유기 용의자로 체포된 한모 씨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습니다. 한 모 씨는 육군 대위로 전역한 전직 여군으로 전역 후 검거된 원룸에서 혼자 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 모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고 경찰은 암매장된 야산에서 발견한 빈 생수병에서 한모 씨와 일치하는 DNA를 발견하였고 한 모 씨의 자택에서도 김 모 씨의 혈흔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