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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Feb 03. 2019

퇴원

 발을 감싼 신발의 감촉이 낯설었다. 생애 처음 신발을 신어본 사람처럼 발가락을 꼼지락 댔다. 자동문을 열고 들어온 공기는 조금 비릿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공기가 이런 냄새였구나. 내 눈치를 보던 자동문은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난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세상. 저 문턱도 없는 경계를 넘으면 시작될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한동안 난 '이기적'이라고 불려졌다. 내가 눈을 뜬 뒤 붙여진 이름이기에 그것을 내 이름이라 하기 마땅했다. 담당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날 불러주었다. 나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기적 이기적'이라고 붙여서 부르면 제법 귀엽기도 했으니까. 내가 처음 이런 농담을 했을 때 엄마도 까르르 웃어주었으니까. 난 이 이름이 정말 좋았다.


 '이수아 씨, 어지러움은 좀 어떠세요?' 담당의만이 고집스럽게 날 이수아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어지러운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시옷이 참 뾰족한 글자라서 그 단어를 들을 때면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는 듯했다, 정말로. 하지만 내가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 진실들을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의사 선생님이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형식적이면서 영양가 있는 진료를 수차례 갖은 뒤에 비로소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자동문이 다시 열리고 휠체어가 들어와 길을 비켜 드렸다. 살짝 찬바람이 불어와서 저도 모르게 등을 파르르 떨었다.


 아빠는 출근하셨고 엄마도 연수 때문에 병원에 오시질 못했다. 며칠 더 병원에 있으라는 걸 완강히 거절했었는데, 갑자기 그날의 내가 미워졌다. 무슨 고집인지, 용기인지, 아직도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 건지.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아빠의 유행어가 생각이 났다.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가 저 말을 자주 했던 것 기억나는데, 그 말을 하는 장면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어, 이기적! 아직 여기 있었네? 잘 됐다.' 엄집사가 특유의 콧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엄집사는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이면서 나와 중학교 동창이었다. 내가 식물이었을 때도 다시 동물이 된 후에도 누구보다 나를 잘 챙겨줬다. '이거 전에 부탁했던 그 애 이메일이야.' 엄집사는 쪽지를 건넸다. '어, 고마워.' 나는 쪽지를 받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 폰 만들었어?' 엄집사의 커다란 눈동자는 내 얼굴에서부터 내 손으로 스르륵 내려와서 손가락 끝에 빼꼼히 걸린 핸드폰을 발견했다. '번호는 그대로지? 이젠 너도 스마트폰 쓰니까 카톡도 만들고 인스타도 하나 만들고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집사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나 보다. 엄집사는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직접 어플들을 설치했다. '너 계정 만들 줄은 알지?' 엄집사는 핸드폰 끝을 잡은 엄지에 힘을 꽉 주며 물었다. 다행히 이번 끄덕임은 그녀를 만족시켰던 것 같았다. 그녀는 등장했을 때처럼 쿨하게 퇴장했다. '고마워' 총총 뛰어가는 엄집사의 뒷모습에 인사를 하다 그만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병원 로비에 설치된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정치 관련 뉴스들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화면 속 사람들도 이 로비 안 사람들도 다들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직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응, 아빠. 아니 아직, 이제 나가려구. 응, 응. 응 알겠어. 응 알겠어. 응, 응, 그래 이따 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다 보니 아이디가 이메일이란 걸 알게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 아이의 사진과 이름이 화면에 나타났다. 아, 비공개 계정. 새끼손톱만 한 동그란 사진을 뚫어져라 보다가 홈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사실 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아주 오랜 잠에 들기 전 이수아가 어디까지 했는지가 기억나질 않았다. 이수아를 탓할 순 없지. 그 아이도 이토록 오랜 잠을 자게 될 줄 몰랐을 테니까.


 다시 자동문 앞에 섰다. 아까 느껴지던 비릿한 냄새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부분의 기억들과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들은 다시 살아가면서 조금씩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아빠가 지난 생일날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해주셨던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이기적은 처음 세상을 만난 아이처럼 참 많이도 울었었다. 병원 사람들이 날 이울보라고 부르지 않아 준 게 고마울 정도로. 이제 저 문을 넘으면 난 이수아다. 조각을 모아 퍼즐을 완성해야 할 사명을 지닌 여주인공. 이윽고 발을 내디뎠다. 발끝의 떨림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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