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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집 Oct 18. 2021

서로를 읽는 시간

모꼬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룻밤

폭풍 같은 게임과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도란도란 불 가에 모여 앉아 놀며 얘기하다 보면 금세 주변이 어둑어둑해진다. 오월이지만 산속의 밤은 제법 쌀쌀하다. 부모들이 챙겨주는 겉 옷도 입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은 밤늦도록 마당과 텐트를 뛰어다니며 노느라 바쁘다. 그러다 하나, 둘 잠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몇몇은 낯선 잠자리에서 아이를 재울 엄두도 못 내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남은 부모들은 각자 아이들의 상태를 살피며 본격적으로 눈치 작전을 펼친다. "이런 데 와서는 자기가 좀 재워, 나도 놀자!" 서로에게 아이 재우기를 토스하는 부부도 있고, 아예 놀기를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눕는 아마(아빠+엄마의 줄임말)도 있다. 

이럴 땐 바른생활 남편을 둔 게 퍽 쏠쏠하다. 나의 남편 거북이로 말할 것 같으면 술도 못해요, 담배도 안 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생활 사나이라 할 수 있겠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침부터 준비하고 운전하고 피곤하겠다. 얼른 안킬로 데리고 가서 누워~" 하고 거북이의 어깨를 다독여 주면 거북이는 가소롭다는 듯 날 쳐다보고는 안킬로에게 간다.(사랑해요 거북이) 

낯선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재우는 일은 만만찮은 미션이다. 간신히 불을 끄고 누우면 누군가 오줌이 마렵다 하고 그러면 우르르 "나도나도!" 하며 번갈아 오줌을 누러 간다. 그다음엔 목이 마르다 하겠지. 그 뒤로 또 우르르. 그리고 이젠 진짜로 자자! 하면 방 안 어딘가에서 훌쩍훌쩍 무섭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한쪽에선 또 깔깔대며 수다를 떠느라 잠이 다 달아나 말똥말똥 토끼눈이 된 녀석들도 있다. 잔잔한 술기운과 피로로 스르르 눈이 감기는 건 어른이 먼저일 수도 있다. 나지막이 깔리는 코 고는 소리.... 하지만! 버텨야 한다. 그들이 잠들 때까지 절대로 우리가 먼저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된다. 

어느 해 인가는 유독 아이들이 잠 못 들고 어수선하게 방문을 들락 거리고 있을 때 고래가 나섰다. 


"너희들 전부 이리 와, 오늘은 엄마 아빠 없이 고래랑 자야 해."


아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단호한 고래의 말에 아이들은 불안하게 아마들을 찾았지만, 다들 '고래잖니, 아빠, 엄마도 어쩔 수 없어 안타깝구나.' 하는 눈빛으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곤 열 명 가까운 아이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얼마 안돼 거짓말처럼 고래가 당당히 컴백했다. 고래를 향한 열렬한 (소리 없는) 박수갈채. 그 외 더 어린아이들은 따로 다른 방에서 재우고 그렇게 어찌어찌 살아남은 자들이 속속 깊은 밤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절 반도 되지 않는 생존율이었다. "지화자(둥굴레 남편)가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연이 재우다 같이 잠들어 버렸어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둥굴레가 옆자리에 앉는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머 두루미 이 밤에 드디어 두루미를 보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통통도 덧붙인다.


"내가 초창기부터 그렇게 두루미랑 친해지려고 부지런히 불러내고 찾아가고 그랬는데.... 참 곁을 안 줘요."


"거북이랑 노느나 그렇지 뭐."


분홍도 거든다. 나는 그만.... 면목이 없어지고 만다. 연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초창기 멤버다. 그만큼 조합에 오래 있었지만 사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아마들과 많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바빠서가 아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소극적인 성격 덕분이다. 학교에 다닐 때도 조용한 성격 탓에 선생님은 하루 종일 교실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몰랐고, 또 그게 편했다. 친구가 없어도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에게는 세 자매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오면 네 자매가 함께 먹고 자며 붙어 있었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오히려 '제발 나만의 독립된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한결같은 소망을 갖고 살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나에겐 딱 좋은 친구 '거북이'가 생겼고,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같이 사는 작은 친구 둘이 더 생겼다. 매일 붙어 살면서도 우리는 우리끼리 노는 걸 좋아라 했다. 집이 넓어도 소파나 침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좋았고, 같이 먹고 놀며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든다는 건? 좀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다. '어차피 가족 빼면 다 남인걸? 가족이랑도 안 맞는 게 많은데 맞는 사람 찾겠다고 애쓰고 싶지 않아. 그러다 실망하고 상처 입고.... 너무 뻔해.' 그런 부분에선 거북이와 참 잘 맞았다. 우리는 시간이 남으면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니라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거나 그도 아니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낯가림이 심한 부부에게 공동육아는 수시로 민폐를 끼치는 당황스러운 불청객 같을 때가 많았다. 


통통이 둘째를 낳고 긴 육아휴직에 들어가게 되자, 본격적으로 엄마들의 네트워크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 애들 데리고 통통네서 놀 거예요, 두루미도 와요."


"텃밭 농사를 지어보려는데 두루미 같이 안 할래요?"


"아이들 가지고 놀 인형 재봉해보려고~ 우리 집으로 와요 두루미."


수시로 엄마들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왠지 부담스러워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안킬로 재워야 해서요." "거북이랑 있어서요." 결혼 전부터 거북이와 함께 시작한 사업을 쭉 이어오며 나는 일과 중 많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했다. 회사 일도 함께 하고 아이들도 함께 돌봤다. 업무 미팅도 함께, 요리와 설거지도 함께인 세트 부부, 그게.... 우리였다. 서로에게 회사 동료이자 배우자이자, 육아 동지, 친구인 일타.... 사피? 


어느 날인가는 젖먹이 둘째와 단잠에 빠져있는데 다짜고짜 통통, 둥굴레, 분홍이 들이닥쳤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답해줄 기력도 없을 만큼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텃밭 다녀오는 길이예요, 이 고생을 왜 사서 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는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위에 땀을 줄줄 흘린 채로 신발을 벗었다. '그런데 왜 우리 집에?' 영문을 모르고 세 사람 뒤를 졸졸 따르는데 걷는 걸음걸음 바닥에 온통 때 구정물 발자국이 찍혔다. 그러더니 거실 맨바닥에 너 나 할 것 없이 풀썩. 등을 대고 드러누워 '에구구구' 번갈아가며 신음소리를 냈다. 하나같이 얼굴이 벌겠다.


"어구 허리야, 삭신이야. 너무 배고프다. 두루미 찬 밥 없어요? 우리 상추랑 고추 잔뜩 뜯어왔는데 쌈장이랑 밥 만 좀 줘요."


나는 얼떨결에 냉장고를 열고 쌈장을 꺼내고 밥을 떴다. 푸성귀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았다. 와구와구 사발 밥을 먹고 새참 먹는 농부 마냥 맥주를 들이켜자 배가 볼록 일어났다. "두루미가 안 오니 우리가 와야지 뭐~어쩌겠어." 그리곤 와하하하. 역시 그런 속셈이었어. 그 뒤로 이들은 무턱대고 내 집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집에 반찬이 없던, 집안 꼴이 엉망이던, 내 꼴이 더 엉망이던 더 이상 당황할 일도 신경 쓸 일도 없게 되었다. 삼십 년 넘게 지켜온 타인에 대한 경계모드가 한순간에 해제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모꼬지의 밤으로 돌아오자.

분위기가 무르익자 통통과 오름(통통의 남편)이 통기타를 꺼내 왔다. 통기타를 보자마자 나는 눈이 번쩍 트였다. 통기타는 나의 오랜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다. 중학교 때 성당 주일학교에서 통기타를 치던 대학생 선생님을 보고 사랑에 빠진 뒤 쭉 기타에 대한 로망을 품고 살아왔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후 짬을 내어 처음으로 뭔가를 배워본 것도 기타였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 기타를 튕기며 알음알음 코드 몇 개를 배우고 '조개껍질 묶어' 같은 기초적인 노래 몇 곡을 연주하는 게 다였지만 언제나 꿈은 포크송 싱어였다. 통기타 만으로 가슴이 쿵닥 거리는데, 통통은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듯 익숙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의 최애, 가수 '시와'의 노래였다. 



<랄랄라>


여기 앉아서 좀 전에 있었던 자리를 본다

아, 묘한 기분 저기에 있었던 내가 보인다

저 하늘 저 나무 저 그늘 저 계단 여기서도 저기서도 똑같아 보일까

저 하늘 저 나무 저 그늘 저 계단 거기에 있었을 땐 볼 수 없었지

흐르는 물소리 떨어지는 꽃잎 발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속에 세상이 비치네 내 얼굴도 비춰볼까


-시와



"두루미 이 노래 알아요?"


"통통이야 말로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시와'라면 나에겐 특별한 인연이었다. 너무나 좋아했던 시와의 노래를 운 좋게 결혼식 축가로 들을 수 있었고, 첫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잠 못 이루며 울고 또 울던 여러 밤을 이 노래로 달래주었다.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울 것만 같던 아이는 시와의 목소리가 들리면 곧 숨소리가 차분해지곤 했다. 나에겐 이만큼 특별하고도 소중한 노래가 없었다. 그 노래를 통통과 함께 흥얼거리고, 우리는 지체 없이 서로의 음악 도서관을 활짝 열고 밤새도록 노래를 꺼내 듣고 부르며 이야기했다. '페퍼톤스'를 좋아하는 통통과 '언니네 이발관'을 좋아하는 나는 '미선이'에서 만나 여고생처럼 꺅꺅거렸다. 오름은 '민중가요'를 주로 연주했는데 나에겐 그 또한 익숙한 음악들이었다. 꽃다지와 노찾사, 김광석까지 이어지는 노래 목록에 이번엔 '풋콩'이 열창을 했다. 


"이 노래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대학교 때 노래패 했거든요."


"저랑 통통은 길거리에서 주로 불렀지요."


우리는 긴 밤 서로의 지극히 개인적인 노래 취향과 함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책을 읽는지, 영화 취향은 어떤지, 어떤 것에 분노하고 뜨거워지는지 같은 것들.... 평소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하며 안도하게 되었던 밥벌이 얘기, 차 얘기, 주식 얘기, 자식 키우는 얘기 같은 것들이 아니라,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터전에서는 아이들에게 졸업 때까지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인지교육도 하지 않는데, '적기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적어도 학교에 가기 전 까지는 머리가 아니라 손 끝, 발 끝, 몸으로 만지고 움직이고 냄새 맡고 보며 자라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그래서 자신의 '이름' 대신 각자의 '상징'을 갖는다. 누구는 나비, 누구는 튤립, 나무, 하트, 해님.... 친구들 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도 쓰고 읽을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모르지 않는다. 친구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기분이 안 좋으면 어떻게 있는지, 함께 뭘 해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안다. 

나는 모꼬지에 갈 때마다 사람들을 자세히 보려고 노력했다. 그럴 기회가 충분히 없는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룻밤은 너무나 귀하다. 그 시간동안 그 사람을 읽으려고 자꾸만 들여다본다. 누군가가 나를 읽어줄 때,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자꾸만 귀를 모으고 들여다볼 때 우리도 아이들처럼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상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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