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거리를 보는 순간, 그 고생의 기억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프라하 여행의 시작이다.
전날 11시간 기차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왕뚜껑을 먹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정말 정말 정말 꿀잠을 잔 후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원래는 오늘 체스키 크룸로프 당일치기 일정이었지만 벨기에에서 야간열차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나의 프라하 여행 일정이 하루가 줄어든 상태. 그래서 예매했던 체스키 크룸로프행 버스 티켓을 취소하고 남은 이틀 동안 프라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사장님이 차려주신 따뜻한 한식을 배부르게 먹고 스텝에게 프라하 관광 설명을 들은 후 밖으로 나왔다. 참 신기한 게 나는 분명 전날 너무너무 너무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비행기표까지 알아봤었다. 여행 초반에 일어나버린 나의 실수와 외로움, 두려움, 사라져 버린 체력 등등등으로 자신감은 완전히 바닥이었고
멘탈은 완전히 깨져버렸고 이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서였기 때문에.
그런데 정말 신기했다.
숙소를 나와서 프라하의 거리를 보는 순간, 그 고생의 기억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아, 이래서 여행을 하는 거구나.
파리, 벨기에와는 전혀 다른 체코의 분위기, 프라하의 느낌, 동유럽 특유의 아름다움,
지금도 생생한 이슬을 머금은 프라하의 돌길, 빨간 전차, 깨끗하고 맑은 하늘, 상쾌한 공기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바꾸어주었다.
내 발걸음은 신이 났다.
프라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마 빨간 전차, 트램이지 않을까. 나 역시 여행을 준비하여 이 빨간 트램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던 그것. 트램이 눈 앞에 있었다. 내가 프라하에 있구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실감 나게 해주었던 그것.
이 날의 첫 번째 나의 프라하 여행코스는 프라하 성이었다. 숙소 앞에서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으로 갔다. 출발 전 스텝이 여행코스를 설명을 해줄 때 프라하는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교통도 편하고 하루 만에 다 둘러볼 수 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덧붙여서 정말 쉽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나 다를까 또 프라하 성이 아닌 엉뚱한 곳에 내렸다. (쉽게 찾아가는 법이 없다. )
구글 맵을 켜고 열심히 걸어서 프라하 성에 도착.
프라하성을 지키고 있는 근위병.
진짜 단 하나의 움직임도 없이 서 있다. 딱 각 잡힌 무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주변에서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대도 투명인간인 듯 미동도 없다. 매력적이다.
프라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드북을 들고 이것저것 맞춰가며 설명을 읽어가며 탐방을 시작했다.
아마 프라하 성 안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세기경부터 건축을 시작한 고딕 양식의 성 비타 성당은 공사가 끊이지 않아서 1929년에 드디어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성 비타 성당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바로 아르누보 화가 무하(A. Mucha)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
유난히 어두운 성당 내부에서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체코 민족인 슬라브인에게 최초로 가톨릭을 전파한 선교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현 체코 대통령의 집무실이나 역대 왕들의 거처로 사용된 구 왕궁은 9세기에 처음 지어졌다. 원래 아주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궁이지만 지금도 대통령이 집무실로 사용하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공개가 된다.
내가 프라하 성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인 근위병 교대식. 프라하 성 근위병 교대식은 매일 정오에 열린다. 내가 도착했을 때 시간이 조금 남아서 프라하 성 안 쪽을 설렁설렁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계를 보니 12시.
깜짝 놀라서 사람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달려가니 근위병 교대식이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몰려 있는 사람들 뒤에 늦게 자리를 잡게 된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키 큰 유럽인들의 예쁜 뒤통수.
내 키 160cm. 컨디션 좋을 때는 가끔 161cm.
유럽인의 평균 신장이 180cm 정도라지.
안 보인다.
뒤에서 까치발을 바짝 들어도 안 보인다. 조금이라도 보려고 계속 폴짝폴짝 뛰어도 안 보인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어떤 남자분이 사진으로 대신 찍어준다고 카메라를 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내 카메라를 가져갈까 봐 경계를 했는데 그의 손에는 이미 대포 카메라 수준의 카메라가 들려있다.
안심을 하고 카메라를 건네자 팔을 높이 들어 근위병 교대식을 찰칵찰칵 찍어준다.
음. 근데 어떠한 냄새가 내 코를 찔러온다. 음. 뭘까. 음.
그는 팔을 높이 들고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음.
아주 열심히 팔을 높이 들고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촬영을 다하고 나에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내 카메라를 돌려주며 확인을 해보라고 한다.
나는 아주 빠르게 카메라 휠을 돌리며 사진을 확인을 하고 아주 밝고 환한 웃음을 지어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이 입장권을 산 이유는 황금소로를 가기 위해서. 프라하 성 내의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연합권은 350Kc.
나는 성 비타 성당, 구 왕궁, 성 이르지 수도원, 황금소로를 갈 수 있는 일부권을 샀다. 이것은 250Kc.
체코를 대표하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몇 개월 간 살았던 집. 프란츠 카프카는 한국에서도 아주 유명하지. 대표작으로는 <변신>이 있다. 프라하 여행 전 그의 대표작 한 두 권쯤 읽어본다면 프라하의 여행이 더욱 의미 깊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알록달록한 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황금소로는 한때 연금술사들이 살던 지역이라 황금 소로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왕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작은 집들은 왕궁을 지키는 경호원들의 집이었으며, 한 때 우범지대로 전락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작은 상점들로 바뀌었으며, 체코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가 살고 있는 22번가 집이 아주 인기가 많다. 황금 소로 안의 작은 상점들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갖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욕구를 꾹꾹 눌러담느라 힘이 들 정도.
프라하성을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면 이렇게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뷰 포인트가 나온다.
나도 저 돌담 위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나의 작은 키와 짧은 다리로 인해 올라가지는 못하고 돌담 사이로 고개를 쭈욱 내밀고 하염없이 붉은 지붕들을 감상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프라하 시내 전경. 체코 프라하의 상징 붉은 지붕들.
늘 사진으로만 보던 이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웠다. 한 참을 돌담에 매달려서 지그시 내려다봤다. 잊지 않도록 기억 속에 꼭꼭 담아두기 위해서.
프라하의 모습을 실컷 보다가 왼쪽으로 난 이 길을 쭉 따라서 내려가면 구시가지로 나갈 수 있다.
거리마다 프라하의 예술가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게 너무 좋다.
계단을 따라 쭉 내려오다가 발견한 뜨레들로 가게.
프라하의 최고의 간식거리인 뜨레들로.
그러고 보니 점심 먹는 것도 잊어서 뜨레들로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아주 아주 아주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직원에게 뜨레들로를 하나 주문했다.
굴뚝 모양처럼 생긴 이 빵에 잘생긴 직원이 누텔라 크림을 발라줬다. 원래 누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날은 참 맛있었다. 바삭바삭바삭, 쫄깃 쫄깃쫄깃, 달콤 달콤 달콤. 이거 정말 별미다. 한국에 창업하고 싶을 정도. 하지만 아무리 그 맛을 살려 창업을 한다고 해도 이곳 프라하에서 먹는 그 맛은 느껴지지 않겠지.
뜨레들로 가게 앞 계단에 앉아서 뜨레들로를 냠냠 맛있게 먹고 있는데 웨딩촬영을 하러 온 예비부부. 자꾸만 내가 있는데 날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저들의 웨딩촬영 사진 뒤편엔 아마도 맛있게 뜨레들로를 먹고 있는 내가 있을 거야.
카를교를 지나가다가 살짝 고개를 돌리니 나타난 풍경. 말도 안 되는 풍경.
와. 프라하는 정말 곳곳이 그림 같은 곳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카를교.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이 아름다운 카를교는 모두 30개의 조각상이 줄지어 늘어선 프라하의 상징이다.
카를교 위에서 만난 예술가들.
프라하에선 모두가 예술가다.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서 만난 밴드. 보헤미안 밴드.
파리에서 만난 보라가 이 밴드의 연주가 정말 인상에 많이 남았다고 CD를 못 산 게 아쉽다고 해서 대신 사주기 위해 찾았는데 역시나 구시가지 광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체코의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뭔가 굉장한 정열이 느껴졌다. CD는 15유로. 체코 돈 코루나로도 받고 있었지만 가지고 있던 유로로 계산.
그리고 프라하의 모든 아티스트들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많이 뺏어갔던 이 바이올린 청년.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서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 청년이 전자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구시가지 광장 가득 울려 퍼지던 그의 바이올린 소리는 늦은 오후 해 질 무렵의 프라하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얼른 카메라 동영상으로 찍어서 캐나다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주었다.
언제였더라 왠지 우울했던 내 생일날, 연주회를 마치고 뒤풀이를 끝낸 후 바이올린을 전공한 내 친구는 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생일 축하한다며 기분 좋게 취한 연주회 팀들과 함께 "생일 축하합니다" 곡을 연주하며 들려주었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가 함께하던 그 생일 축하 곡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앙코르곡으로 "SHE" 까지. 아직 내 롤리팝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있는 그 영상. 언젠가는 공개해야지.
지금도 가끔씩 꺼내서 보는 그 바이올린 청년의 모습.
어쭙잖게 듣는 귀만 있어서 이 곡의 제목은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곡 제목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해요 ♥)
구시가지에서 한참을 넋을 잃고 구경을 하다가 구시가지 광장 옆 하벨 시장으로 갔다. 소소한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돌았던 하벨 시장. 하벨 시장의 규모는 아주 작지만 기념품을 사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지만 사진 촬영을 상인들이 싫어하니 카메라는 잠깐 꺼놓는 것이 좋다.
하벨 시장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기념품인 목걸이.
영문 이름을 써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뚝딱뚝딱 만들어 준다. 내 이름 HyeJin. 뒤에 하트가 앙증맞다.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튀어나온 남자가 나를 보며 "예쁘다 ~!"
장사 좀 할 줄 아네. 그래 여기서 사야지. 어떤 게 제일 잘 그린 거냐고 물어보니 이것을 추천해준다.
좋아. 나도 얘네가 맘에 들었는데. 하며 GET.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 한국인에게 이미 유명하다는 믈레니체 (Mlejnice)를 찾아갔다. 구시가지 광장 근처이기 때문에 골목골목 찾아가면 비교적 쉽게 찾을 수가 있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 체코에서 유명한 음식은 꼴레뇨. 한국의 족발과 비슷하게 돼지의 정강이로 만들어진 요리라고 하는데 혼자서 그 꼴라뇨를 다 먹을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대신 굴라쉬를 주문하고 코젤 다크 맥주도 함께 주문했다.
코젤 다크. 체코의 대표 맥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원래 흑맥주를 못 먹는다. 예전에 기네스를 한 번 맛봤다가 그 탄 맛 같은 진한 맛에 너무 놀라서 그 뒤로 흑맥주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체코에 왔으니 대표 맥주는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주문한 코젤 다크.
근데, 와 내 인생 맥주가 되었다.
코젤 다크는 흑맥주이지만 전혀 탄 맛이 느껴지지 않고 그 부드러운 목 넘김이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이 너무너무 그립다. 코젤 다크를 파는 곳에 가서 꼭 다시 그 느낌을 느껴야지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맛보지 못했다.
굴라쉬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음식인데 같은 동유럽이라서 그런지 프라하에서도 쉽게 굴라쉬를 찾아볼 수 있다. 빠네 파스타처럼 나온 프라하 Mlejnice의 굴라쉬 뚜껑을 열면 마치 장조림과 같은 비주얼의 굴라쉬를 만날 수 있다. 귀엽게 둥둥 떠있는 양파 슬라이스와 아주아주 큼지막한 고기 조각들이 가득 들어있다.
한 조각을 꺼내서 먹기 좋게 잘라서 맛을 본다.
오오오 맛있다!
한 조각을 더 먹으니 아우 짜다. 정말 짜다. 동유럽의 음식들이 비교적 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나도 웬만큼 짠 음식은 잘 먹는 부산사람이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짜다. 빵 뚜껑을 뜯어서 함께 먹으면 그나마 짠맛이 좀 가신다. 하얀 쌀밥이 있다면 비벼먹으면 진짜 대박 맛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프라하 한 복판에서 흰쌀밥을 찾을 수는 없지. 아쉽지만 고기 두 조각만 맛보고 코젤 다크에 반해 맥주는 싹 비우고 기분 좋게 나왔다.
구 시청사의 벽면에 있는 이 천문시계는 관광객이 사랑하는 명소이다. 천문시계는 정각 5분 전 천문시계의 인형들의 행진이 시작되는데 해골 인형이 줄을 당기면 성경 속 예수의 12제자가 연이어서 나왔다가 들어가고 마지막에 닭이 울면 정각을 알리는 종으로 이어져 끝난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천문시계 앞에는 언제나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소매치기도 많이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장소.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프라하의 모습.
나는 발걸음을 다시 낮에 들렸던 까를교로 옮겼다.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의 아름다운 모습.
카메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아름다운 프라하의 야경.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서 나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인생 맥주, 코젤 다크와 함께.
한 잔 더 마시고 올걸. 지금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