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이 화산활동을 할 당시 마치 죽 끓을때 표면 여기저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처럼 함께 마그마를 뿜어대던 작은 화산(=기생화산)들이 지금의 오름이다. 당연히 정상엔 그 형태는 천차만별이지만 화산활동의 흔적인 분화구 비슷한 것들이 있고, 그런 오름이 제주 전역에 368개가 포진되어 있다. 몇몇 산과 봉들도 알고보면 모두 오름이다. 송악산은 절울이오름, 지미봉은 지미오름이라고도 불린다. 해발로는 1천미터가 넘는 것도 있지만 실제 체감높이인 표고는 대부분 1백미터 안팎이다.
오름은 그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 있었음에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이다. 제주를 배경으로 <신혼은 아름다워>란 신혼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던 90년대까지, 여행자들의 동선엔 오름같은 건 없었다. 공항 근처 용두암 잠깐 보고, 동쪽은 만장굴, 성산일출봉과 성읍 민속마을 정도만 찍고 나면 나머진 중문근처의 바다, 여미지 식물원, 지금은 사라진 목석원 정도를 구경하다 돌아가기 전날 한라산을 오르는게 일반적인 코스였다. 마치 제주를 처음 찾는 외국인들의 동선과 흡사하다.
저가항공사들의 출현으로 제주 여행이 만만해지면서, 제주도는 더이상 특별한 곳이 아닌 아무때나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2007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제주 올레길 21개 코스 대부분이 오름 한 두개쯤은 거쳐 가다보니, 오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름의 인기상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분은 동쪽 용눈이오름을 용상의 반열에 올린 사진작가 김영갑과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동쪽 백약이오름, 서쪽 금오름을 금값으로 만든 가수 이효리다. 두 사람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발로 즈려 밟다보니 용눈이오름과 백약이오름은 현재 출입통제(=휴식년) 중이고, 차로 오르는 몇 안되는 오름 중 하나인 금오름(=금악오름) 역시 이젠 걸어서만 오를 수 있다.
개인적인 오름예찬 이유는
1) 사람이 상대적으로 없다. 유명 오름조차 몇십명 내외, 자연히 입장료도 없다.(성산일출봉과 산굼부리는 예외)
2) 등산과 산책(정상 분화구 둘레길)이 동시에 가능하다. 즉 건강도 챙기며 사색까지 할 수 있는 일석이조!
3) 등산을 싫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조차 오르기 만만하다.
4) 부담없는만큼 자주, 반복해서 오를 수 있어 제주 사계의 변화와 온갖 종류의 들꽃 등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9년간 제주에 살며 수십개의 오름을 오르다보니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TPO)에 따른 오름 즐기기 노하우가 나름대로 생겨 공유하고자 한다.
언제 가도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는게 오름이지만, 요즘같은 늦가을엔 무조건 억새로 유명한 오름을 가봐야한다. 동쪽에선 따라비오름 서쪽에선 새별오름이 Top 2이지만, 좀더 한적하게 억새의 물결에 빠져보고 싶다면 아끈다랑쉬 오름과 큰사슴이 오름(=갑마장길)을 추천한다. 비가 온 다음엔 정상인 분화구에 호수를 담고 있는 물영아리 오름과 가기엔 조금 힘든 사라오름이 제격이다.
신년벽두 해돋이 명소인 성산일출봉 보다는 근처 종달리에 있는 지미오름을 강추한다. 둘 다 바다 일출지만 지미봉에선 우도와 일출봉을 좌우로 품고 해가 떠올라 더 근사하고 한적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반대로 석양을 즐기고 싶다면 새별오름같은 서쪽의 오름들이 좋지만 동쪽의 용눈이오름이나 동거문오름에서 보는 해넘이도 매우 로맨틱하다. 특히, 공항 근처의 도두봉은 멋진 석양과 함께 바로 앞 제주공항에서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해질 무렵 공항에 배웅한 지인이 탄 비행기를 도두봉에서 다시 한번 떠나 보내는 의식을 치뤄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동거문오름에서 바라본 석양
등산을 싫어하는 분이라면 표고 51m의 야트막한 아부오름이 좋다. 그마저도 오를 수 없는 연로한 부모님과 함깨라면 차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대평에 있는 군산오름이 유일한 대안이다. 몇년전만 해도 차로 오르거나 내려갈 때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요즘엔 최소 한 두번은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외통으로 마주치기에 운전이 미숙한 분들은 절대 올라가선 안된다. 앞에서 말한대로 금오름처럼 군산오름도 조만간 차량출입이 결국은 통제될 걸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서너 시간의 제대로 된 탐험을 즐기고 싶다면 교래리의 큰지그리 오름이나 남원에 있는 마흐니 오름이 좋다. 오전이 아닌 점심무렵에 트래킹을 시작하시라. 초입에서 오전에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는 사람 몇몇을 보내고 나면, 마주치는 생명체라곤 노루와 꿩들밖엔 없는 극한의 외로움을 맛볼 수 있다.
별을 보고 싶다면 바다와 좀 떨어진 오름들이 좋다. 바람이 없는 날엔 으레 불을 밝히고 조업 중인 배들이 많기에 바다가 보이는 오름 위에선 광해로 별이 잘 안보인다. 또한 밤에 오름을 오르는 건 살짝 무서울 수도 있기에 가급적 야트막한 오름이 좋다. 아부오름이 딱이다.
정리할 겸 장소별로 비교적 괜찮은 오름들을 열거하자면,
동쪽은 동거문/따라비/다랑쉬/(용눈이)/아부/(백약이)/물영아리/좌보미/안돌/밧돌/말미/알오름, 서쪽은 새별/녹고메/저지/궷물/수월봉/당산봉/바리메오름, 남쪽은 제지기/바굼지/절울이/고근산/삼매봉/영주산/군산/섯알/영아리오름, 북쪽은 거문/도두봉/서우봉/어승생악/절물/거친오름 정도다.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구좌읍에 오름들이 밀집되어 있다보니 동쪽에 괜찮은 오름들이 더 많이 포진되어 있다.
오름을 찾는 여행객이 점점 많아지면서 통제되는 오름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으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분화구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말발굽 형태의 송당의 체오름은 다른 오름에선 느낄 수 없는 원시적인 영험한 기운을 준다. 특히 분화구 한가운데 덩그라니 놓여있는 일명 왕따나무는 사진명소로도 유명한데 사유지라 몇년전부터 땅주인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오름이 덜 알려진 십년 전쯤 오름의 매력에 빠진 난 그나마 행운아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산책로조차 변변치 않았던 지난 세기 김영갑님 같은 초창기 오름 나그네들은 오죽했으랴!
아직 오름을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분이시라면 원형의 거대한 분화구에 압도되는 남성형 오름의 대표격인 '다랑쉬 오름'과, 분화구가 골짜기 형태를 이루는 여성형 오름의 대명사 '따라비 오름(=오름의 여왕)' 딱 두 개만이라도 도전해 보시라. 당신도 오름쟁이가 되어 오름 도장깨기에 빠지리라 확신한다.